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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가 그리운 시절, 어계 조려를 기억하다
여산 2009-02-0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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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북마을 서산서원 입구 흥선대원군 때 훼철된 이후 1980년에 이르러서야 현위치에 복원되었습니다. 원북마을의 랜드마크이며, 대형버스를 이용한 경우 이곳 주차장에 세워두어야 합니다. ⓒ 서부원 함안 조씨 집성촌

수도권과 더불어 지방재정자립도가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경상남도에도 자동차보다는 소가 끄는 수레가 더 어울릴 법한 '오지'가 있습니다. 시원스레 뚫린 남해고속국도를 나와 군북면소재지를 벗어나니 노견도 없는, 외길 같은 2차선 도로가 이어집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 길가에 핀 코스모스의 손짓을 따라 속세를 벗어나 은둔처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함안 조씨가 모여 사는 원북(院北) 마을을 향하는 길입니다. 이곳은 조선 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키고자 낙향한 어계(漁溪) 조려(趙旅)와 그 후손들이 일군 집성촌입니다. 경상남도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 조려는 김시습, 이맹전, 원호, 성담수, 남효온과 더불어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초 유학자입니다.

마을이 등을 기대고 있는 야트막한 방어산 고개를 넘으면 순천과 부산을 잇는 남해고속도로가 뻗어있고, 마을 앞에는 경전선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으니 번잡하고 요란할 법도 하건만, 대낮인데도 가문 실개울 물소리가 들릴 만큼 한적한 시골입니다.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으니 도로는 가을걷이한 낟알을 말리는 건조장이 되었고, 이따금씩 들리는 경운기의 소음마저 정겹습니다.
깊게 패인 촌로의 주름에서 마을 전통을 보다

▲ 서산서원 내부 전경 근래 들어 복원된 까닭에 내부가 공원처럼 새뜻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그러나 서원의 공간 배치는 정형화된 틀을 따라 동재, 서재, 강당, 사당이 질서정연합니다. ⓒ 서부원 함안 조씨 집성촌

마을 어귀에 어계 조려를 배향한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저택의 정원처럼 새뜻하게 단장된 까닭에 마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의 명실상부한 얼굴이자 랜드마크이며, 마을 구경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와서야 지금의 자리에 복원된 것이니, 옛 모습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마을의 속살을 들여다보자면, 서원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동네 '마실'다니듯 게으르게 걸어 다녀야 합니다. 마을 안 좁은 고샅길마다 시멘트로 포장돼 있어 승용차로 나다닐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수박 겉핥는 격입니다. 구수한 사투리로 건네는 촌로의 후덕한 인사를 만날 수 없고, 조롱조롱 흐르는 개울가 물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며, 가로수처럼 늘어선 감나무에 아슬아슬 매달린 까치밥 홍시들의 군무(群舞)를 즐길 행운도 누리지 못합니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을 관통하는 오른편의 고샅길로 접어듭니다. 열녀문과 송덕비 등이 늘어서 있고, 족히 일이백 년은 됐음직한 기와집들이 많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집성촌의 예스러운 맛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별장 같은 붉은 벽돌집이 도드라지고,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는 괴리된 음식점의 간판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외려 길에서 마주치는 주름 깊게 패인 촌로들의 삶이 마을의 오롯한 전통을 힘겹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명문가 고택 치곤 너무 소박한 조려의 옛집

▲ 퇴락한 채미정과 청풍대 낙향한 후 어계 조려가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낸 곳입니다. 담벼락 앞에 차도와 육각지붕의 정자인 청풍대 아래로 기찻길이 놓여 있어, 무척 어수선합니다.

어계 조려가 낙향한 후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냈다는 채미정(採微亭)과 청풍대(淸風臺)는 이미 지붕이 내려앉을 듯 퇴락했고, 들어가는 철문조차 녹슬어 열리지 않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진지 꽤 오래됐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담벼락 뒤 철길로 기차가 지나갈 때면 그것이 기차의 경적소리인지, 어계 조려의 혼이 애달파 우는 울음소리인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주나라 때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해 이름 붙인 채미정에는 어느덧 서글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어계 조려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가, 퇴락한 건물처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흡사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듯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육신이 다 그러했듯 어계 조려는 벼슬에 뜻을 접고 낙향한 후 단 한 번도 바깥세상과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완전히 절연한 채 철저히 은둔함으로써 불의한 사회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것은 후대에 걸쳐 혼탁한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으로 존숭돼 가풍으로 이어졌고, 이 마을의 규범이자 문화로 뿌리내렸습니다.
충절을 보여준 선비의 은둔은 후대 뭇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을지언정 가문의 몰락과 가난이 따르는 법, 어계 조려의 삶도 예외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마을 뒷산 대숲에 숨어있는 어계 조려의 옛집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명문가의 고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가 살던 집이 남았을 리 없지만, 번듯한 여느 고택과는 달리 사랑채로 쓰였음직한 조그만 건물과 사당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본채를 압도하는 키다리 솟을대문만 없다면 시골의 여느 살림집 마냥 초라합니다. 살던 사람마저 떠나버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에 더욱 을씨년스럽습니다.
조려 고택엔 300년 된 보물이 있다

▲ 어계 고택 전경 명문가를 상징하는 높다란 솟을대문보다 3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먼저 눈에 띱니다.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지만, 고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도 다 이 나무 덕분입니다. ⓒ 서부원 함안 조씨 집성촌
그러나 이곳에는 명문가로서의 기품을 느끼게 해주는 '보물'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비좁은 마당을 화분 삼아 서 있는, 300년가량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그것입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공자의 뜻을 본떠 어계 조려의 후손이 심고 가꾼 것입니다.

학문과 절개를 상징하는 이 신목(神木)은 후손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주는 죽비가 돼 주었고, 지금은 고택의 상징이 되어 찾아온 이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화살표가 그려진 손바닥만 한 안내판 하나만으로도, 500m 남짓 외따로 떨어진 고택을 쉬이 찾을 수 있는 것 또한 이 나무 덕분입니다.

어계 조려가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닌데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할 만한 곳도 아닌 탓에 외부 관광객을 거의 볼 수 없는 외진 마을이지만, 마을길에서 인사를 나눈 한 촌로의 말에 따르면 올 들어 마을을 찾아온 이들이 제법 늘었다고 합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함안 조씨의 후손임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더라"며 웃어 보였습니다. 

개인이 사진기 둘러메고 찾아온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주제를 정해 답사를 온 단체 관광객이랍니다. 말하자면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어계 조려라는 인물을 통해 당대의 역사를 공부하고 지금의 우리 사회를 이해해보려는 노력들입니다. 결국 애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느끼고자 하는 가치는 바로 당대의 지배층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절개'입니다.

어쩌면 '권모술수와 배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선한 마음속 '절개'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여행이라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 좋고 물 맑은 유원지와 유명 관광지가 지척에 널려있는데 굳이 볼 품 없는 '오지'를 찾는 까닭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 어계 고택의 재실인 원북재 고택의 옛 자취는 모두 스러지고, 사랑채 또는 별당채로 쓰였음직한 이 건물만 남았습니다. 어계 조려는 검박하고 단출한 이곳에서 바깥세상과 절연한 채 철저히 은둔했습니다. ⓒ 서부원 함안 조씨 집성촌
조려가 불의한 세상을 용납 못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은둔한 지 300년이 지나서야 '충신'이라는 칭송을 얻고 역사적 평가를 받았듯, 그로부터 다시 3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절개'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평가받는 시대가 다시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을날 한나절 퇴락한 오지 마을을 하릴없이 거닐며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마을을 나서려니 들어올 때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갑니다. 이번의 경적 소리는, 자존을 지키며 살기 위해 목숨을 내걸 필요가 없는 '민주화'된 세상이 됐건만, 보잘 것 없는 감투 하나, 돈 몇 푼에 양심과 소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우리 사회를 비웃는 웃음소리 같았습니다.

2008년 10월 18일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