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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 살포시 앉은 뭉개구름이 어계 혼백인가
여산 2009-02-04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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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소띠 해인 기축년에 접어들면서 소처럼 부지런하게 일하자고 스스 로에게 약속했지만 땀방울을 쏟을 논과 밭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저만치 논과 밭은 숱하게 널려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가 지주자리를 꿰차면서 일자리를 잃은 일꾼들이 너무 많아 소작조차 붙이기도 어렵다.

올 한 해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보아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만  족집게처럼 골라 퇴출시키는 '이명박 보릿고개'를 넘길만한 뾰쪽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보릿고개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갈박이 깨지고 온몸에 상처가 나더라도 이 고된 보릿고개와 마빡을 맞닥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생육신이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으로 숨어버린 어계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가는 길. 저만치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늘 푸른 소나무가 돈벼락 한번 맞고 싶은 나그네 꿈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 솔숲 속에 오랜 돈가뭄에 시달려 천 원짜리 한 장에도 발발 떠는 나그네 닮은 나무들이 나뭇잎을 홀랑 벗은 가지에 매서운 칼바람을 매달고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희부옇게 말라가는 지푸라기가 풀썩이는 논두렁 물꼬 곳곳에도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이 불황처럼 매달려 있다. 소리개 한 마리 그림처럼 떠 있는 저 편 하늘 아래 산에서는 장끼가 오호~ 우는가 싶더니 푸드득 소리와 함께 뭉개구름 속으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돈가뭄과 추위에 웅크린 나그네 어깨를 활짝 펴 주듯이.
땡겨울 찬바람 맞으며 봄을 부르고 있는 짙푸른 양파와 마늘

경남 함안 가야읍에서 마애사 쪽으로 1004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길가에 깡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바람을 숭숭숭 내보내고 있는 은행나무가 차렷 자세로 줄줄이 서 있다. 만약 늦가을에 이곳에 왔다면 동화 속에 나오는 소년처럼, 황금빛을 뽐내며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에 포옥 파묻힐 수도 있었건만 아쉽다.

서산서원을 지나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는 채미정 맞은편에 웅크리고 있는 고즈넉한 마을로 들어선다. 이 마을이 어계 조려 선생이 태어난 집을 품고 있는 원북 마을이다. 가난한 서민들 마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개울을 따라 마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저만치 정자 하나가 나그네 발걸음을 붙든다.
여름 같았으면 이 정자에 걸터앉아 졸졸졸 흐르는 개울에 나그네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면서 잠시 쉬어가련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텅 빈 정자가 너무 추워 보인다. 정자 뒤 밭에는 땡겨울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늘과 양파가 짚빛으로 메말라가는 마을에 짙푸른 빛을 뿌리며 봄을 부르고 있다.

어릴 때 나그네가 태어나 자란 고향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마을. 이 마을 곳곳에는 한 집에 감나무 두어 그루가 꼭 있을 정도로 감나무가 차암 많다. 까치 한 마리 배가 몹시 고픈 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앉아 바람이 불때마다 이리저리 휘어지며 진갈색으로 얼어붙은 까치밥을 콕콕 쪼고 있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어계 혼백을 머리에 이다.
"그때는 누구나 다 신랑 얼굴 한번 안 보고 부모님 시키는 대로 무조건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나는 창녕 조씨이고, 신랑은 함안 조씨였거덩. 옛날에는 같은 성씨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도 본이 달라 괜찮타캤지. 그나마 신랑 얼굴이 참 미남이라서 지금까지 내 사슴(가슴)에 못이 박혀 있다 아이가."
어계 선생 생가에 다다르자 500년 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서 파아란 하늘에 떠도는 뭉게구름을 어계 혼백처럼 머리에 이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암컷이다. 이곳에서 재실을 지키고 있는 창녕댁 조설자(80·창녕 조씨) 할머니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 은행나무에 은행이 우찌나 많이 달리는지 마을 사람들이 다 나누어 묵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어계 생가(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592)를 돌보고 있는 조설자 할머니는 "어계 생가는 지금 함안 조씨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녕댁을 따라 어계 생가로 들어서자 생가 뒤편에 초록빛 대나무가 빼곡히 서 있다. 파아란 하늘로 쭉쭉 뻗은 대숲 위에는 뭉게구름이 어계 혼백처럼 살포시 앉아 나그네에게 손짓하는 듯하다.
어계 생가에는 '원북재'(院北齋)를 사이에 두고 오른 편에는 '금은유풍'(琴隱遺風), 왼 편에는 '어계고택'(漁溪古宅)이란 하얀 글씨를 매단 재실과 '조묘'란 글씨가 나붙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어계 조려 선생이 짚고 다니던 죽장(竹杖)과 왕에게 받은 동제향로(銅製香爐)가 있다. 하지만 사당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단종 장례 치른 뒤 낙향해 낚시로 일생을 보낸 생육신 어계 조려
어계 생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솟을대문은 3칸이다. 마치 생육신 어계 선생 지조처럼 가운데 우뚝 솟은 그 솟을대문을 사이에 두고 방 두 칸이 딸려 있다. 원북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이 건물 특징은 부엌 없이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양쪽에 툇마루를 둔 방을 1칸씩 두고 주변에 흙담을 둘렀다는 점이다.
'조묘'란 이름이 붙어 있는 사당은 3칸 일(一)자형 평면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를 닮은 맞배지붕이다. 기둥과 문채 곳곳에 붉은 칠이 되어 있는 이 사당 처마 곳곳에는 아름다운 단청이 섞여 있다. 안내자료에 따르면 어계 선생과 부인에게 제를 올리는 이 사당은 건물 구조, 재료, 형태들이 조선 후기 평범한 민가 모습을 띠고 있다.
까맣게 말라붙은 수세미 두어 개가 을씨년스럽게 매달린 담장 너머에 있는 집은 어계 선생 종가이다. 이 종가에는 "한국전쟁 때 남편이 군대에 간 뒤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조설자 할머니가 60여 년째 살고 있다. 조 할머니는 "어계 생가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집안은 함안 조씨 정절공 종중"이라고 귀띔했다.
어계 조려(1420-1489) 선생은 조선시대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어계 선생은 세조가 단종을 왕 자리에서 끌어 내렸을 때 단종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영월에서 단종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단종 얼을 동학사에 모신 뒤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어조대에서 낚시를 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세월은 총알처럼 재빠르게 흐른다. 세월은 흐르면서 그 어떤 역사를 고스란히 남기기도 하고, 그 어떤 역사는 깡그리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이 함안 원북 마을에 아로 새겨둔 그림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지워져서도 안 된다. 그래야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
2009년 1월 17일
<오마이 뉴스> 이종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