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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사적지 순례(마산화수회) 예정
조억제 2010-10-09 3,078
183.104.49.150


① 淸泠浦(청령포)
강원도 남면 광천리 (영월IC )
청령포(淸浦)지정번호 : 강원도기념물 제5호 지정년월일 : 1971.12.16 소재지 : 남면 광천리 산67-1임, 산 68 임 청령포는 영월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었음. 동·북·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육륙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다. 세조 3년(1457)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고,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침수되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단종은 자규루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을 달래기 몇 달 만인 같은 해 10월 승하. 청령포에는 청포금표비(淸浦禁標碑), 단종유지비(端宗遺址碑), 관음송(觀音松), 노산대(魯山臺), 망향탑(望鄕塔) 등을 보며 단종의 유배생활을 엿볼 수 있다.
② 어계선생 조려(趙旅) 사적비원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 5리 (영월 흰재)호배도강설(虎背渡江說) *호랑이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노산군(魯山君을 영월에 안치하고 청령포(淸泠浦) 나루를 누구나 마음대로 건널 수 없게 조치하였다. 諱 旅 선조님의 거주지인 함안과는 거리가 오백여리나 되는데도 선조님께서는 한 달에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으며 중도에 관란(觀瀾) 원호(元昊)의 집에서 유숙하였고 매일 밤 성수(聖壽) 만세(萬歲)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정축년(1457) 10월 이십사일에 노산군의 승하소식을 들은 선생은 밤낮을 달려 청령포(淸泠浦)에 당도하니 한 밤중이었으며 나룻배도 없었다. 이리저리 헤매어 찾았으나 건널 수 있는 방안이 없어 가슴은 답답한데 날은 점점 밝아져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강물도 함께 오열하였다. 마침내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강을 헤엄쳐서 가려 하던 차에 홀연히 등짐을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아 돌아보니 크나큰 호랑이였다. 선조님께서 말하기를 “내 천리 길 분상(奔喪)에 이 강을 못 건너고 있노라. 이 강을 건너서 왕의 옥체를 염습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창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거늘 너는 어쩌자고 나를 당기는고?” 하니,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창포위에 엎드렸다. 그 뜻을 알아 챈 선조님께서 즉시 그 등에 업혀 강물을 건너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다만 두 사람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통곡 사배하고 시신의 수렴(收殮)을 마치고 문을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너 주었다.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호랑이가 청령포를 건너 주어 조옹(趙翁)이 노산군(魯山君)을 수렴 하였다네”(虎渡淸泠浦 趙翁殮魯山 )라는 시를 남겼다. 영월의 청령포에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의 사적비가 1987년에 영월 충절 현창회(寧越忠節 顯彰會)가 주관(主管)하고 자손들의 헌성(獻誠)으로 호랑이 상을 좌대(座臺)로 하여 건립되었다.

③ 관풍헌(觀風軒)
관풍헌은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 건물로서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건물은 태조 1년(1392)에 객사와 함께 건립되었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에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과 공생(貢生) 화득(禍得)의 교살에 의해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라고 한다. 관풍헌이 있는 객사의 정문을 백운루(白雲樓)

④ 선암마을 한반도지형
한반도면 옹정리 산 180번지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⑤ 寧越三公題名岩 (영월삼공제명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3리 산 99林
이 바위는 1987년 무릉 ~ 운학간 도로 확충공사로 파괴 되었다가 1990년 영월 충절 현창회가 원 위치에 서 서남쪽으로 백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
(삼공제명암은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요선정(遼仙亭)을 마주보고 있다.
桃 漁 觀
村 溪 瀾

李 趙 元

亨 旅 昊 碑 蹟 記 錄 名 題(제명록기적비)

◎ 景泰◯年三月 기망에 치악산 돌에 세기다(년도를 알수없음)
경태(1451년 문종원년 ~ 1456년 세조2년으로 중국 명나라 대종의 연호)
⑥ 邀僊亭(요선정)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강 기슭 큰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라 새긴 刻字(각자)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지정 되어 있다.
요선정은 불교 전성기인 통일 신라시대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 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또한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열반했을 때에는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지금도 정자 주변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작은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요선정 앞에는 치악산에서 흐른 물이 옛 흥녕선원지 앞을 지나는 법흥천과 합류하여 맑은 계곡을 형성하고, 깊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는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넓게 깔려있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강기슭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고 있다.
이 글씨는 조선시대 시인이며 서예가인 楊蓬來(양봉래)가 평창군수 시절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와 일대의 경관을 즐기다가 새겨놓은 글씨라 전해오고 있다.
邀僊(요선) 또는 邀仙(요선)이라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요선정은 대대로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세하, 곽태응, 이응호를 중심으로 하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 세 임금이 써준 御製詩(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세운 정자이다.

요선정에 봉안되어 있는 어제시는 두 틀 板額(판액)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에는 '숙종대왕어제시'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무릉리 마애불좌상
요선정 옆 바위 한면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좌상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하였는데 오른 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오른 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였으며, 그 중 두광은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하였고, 신광은 두줄로 선각해 놓았다.
밑으로 연꽃 문양의 대좌가 있어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3.5m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마애불상으로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호(元昊)
자 : 자허(子虛)
호 : 관란(觀瀾)/무항(霧巷)
시호 : 정간(貞簡)
생몰년 미상.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원주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 원주 출신.별장 헌(憲)의 아들이다.1423년(세종 5)에 문과에 급제,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내어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1453년(단종 1)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1457년(세조 3)에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조카인 판서 효연(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는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단종의 장릉(莊陵)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우고는, 여러 아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에 의하여 고향에 정려가 세워짐1782년(정조 6) 김시습(金時習)·남효은,성담수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李秀亨
생년 1435년 ~ 1528년
본관 우계
대표관직 평시서령
본관 우계(羽溪).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고조부는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개국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지낸 이의(李薿), 증조부는 호분위(虎賁衛)를 역임한 이만(李蔓), 할아버지는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지낸 이인숙(李仁淑), 아버지는 군자감주부를 지낸 이경창(李景昌),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예문관제학을 지낸 안구(安玖)의 딸이다.
이수형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20세에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 5품직을 받았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平市署令:종4품)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들인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과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장인의 고향인 순흥 도지리(道知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이수형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를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21세에 은거하여 94세로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집이 있는 한양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자신이 지은 가옥의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지리의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엇창살만을 만들어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고, 북쪽 벽은 종이로 앞에 놓인 마루를 가리게 하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아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게 했는데 이는 모두 장릉(莊陵, 단종릉)이 있는 영월 방향을 항상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 관광 투어 버스 해설 단체관광객 30인 이상 .
영월관내 3개소 이상 관광할 경우 (비용 : 무료)
♣ 안내 (이갑순) : 010-2364-4167
연락처: 문화관광과 033)370-2460. 2542
청령포 입장료 : 일반(2000월) 단체(1600원) 경노(200원)
☞ 식사 청령포 선견후
◉ 서마산 IC ⇨구마고속도로 ⇨ 대구 금호 분기점(중앙고속국도)⇨제천 IC
38번국도 ⇨ 영월 (소요시간 3시간 30분) 청령포 나루터
장릉(莊陵)규모.양식 : 능, 면적 : 3,495,236㎡ 시대 : 조선 숙종 소재지 : 영월읍 영월읍 영흥12리 산131-1
영월읍 영흥12리 산 131-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조선 제6대 왕인 단종(端宗:1441~1457) 능침(陵寢)으로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의 능으로, 단종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졌던 것을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지금의 장릉 자리에 몰래 묻고 잠적해버린 후, 중종 11년(1526) 왕명에 의하여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해 봉분이 꾸며졌고, 숙종 24년(1698)에 장릉(莊陵)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 23년(1441)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후 1457년 청령포에서 2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셨다. 경내에는 단종대왕신도비(端宗大王神道碑), 정자각(丁字閣), 영천(靈泉), 배식단(配食壇)과 배식단사(配食壇祠), 수복실(守僕室),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 낙촌기적비(駱村紀績碑), 배견정(拜鵑亭)등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석수(石獸)등의 석물이 배열되어 있으나 무인석(武人石)은 없다. 봉분주변에는 둥근 담장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