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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堂 趙任道 先生
초림 2010-10-13 1,941
183.104.49.150


조임도(趙任道)先生
자 : 덕용(德勇)
호 : 간송당(澗松堂)
생졸 : 1585 (선조 18) - 1664 (현종 5)

1585년(선조 18)∼1664년(현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안 자는
덕용(德勇),호는 간송당(澗松堂). 식(埴)의 아들이다. 김중청·고응척·장현광 등을 사사하였다.
▪ 남명 조식선생의 덕천사우연원록에는 사숙인 란에 서열 첫 번째 .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 管窺瑣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거상대절 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 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 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금라전신록 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유사 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국조보감 현종3년(임인 1662) 12월 어사 남구만의 첨언에 보면 인조. 효종 두왕조에 걸쳐 王子師傳(왕자사부)과 좌랑에 제수 되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또나른 내용은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뒤 공조자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松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澗松集

인조(仁祖)16대왕,1595 (1623~1649)은 14대 선조왕의 4번째 인빈김씨 오자중 3번째 군 원종의 아들이며, 인열왕후 한씨와의 사이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장자 소현세자(1612~1645),둘째로 왕이된 (봉림대군)효종(1619~1659), 셋째 인평대군(1622~1658),넷째 용성대군(결혼전 읽찍사망)을 두었으며
효종(孝宗)17대왕 (1649~1659)은 인조왕의 둘째 자 이며 인선왕후장씨와의 사이에는 18대 왕이 된 현종(1659 ~ 1674)만 있음.

간송 조임도 (澗松 趙任道) 선생 사우(祠宇)의 자미화(紫微花)

{취산군지} [이사](異事)에 보면 망우당 유허비에 관한 이사와 함께 조간송 사우(祠宇)의 자미화(紫微花 : 백일홍나무, 배롱나무)에 대한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依舊簇立云趙澗松先生祠宇內有紫微花一樹 本先生手植而 屢世經驗則 其宗家運否則其本死幾年間之無枝葉 幾年後其家運復則 或一?生芽惑中心出芽云而

(조간송 선생님의 사우 안에 자미화(백일홍) 한 나무가 있으니 이는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다. 여러 대(代)로 경험한바 그 종가의 운이 쇠(衰)한 즉 그 나무가 말라 죽어서 몇 해고 원 줄기와 가지와 잎이 없어지고 또 몇 년 후 그 집안 운이 돌아 온 즉 그 한쪽에 눈이 트고 혹은 중심에서 눈이 나와 옛날처럼 순이 무성하게 자라나더라고 한다.)

1633년으로 함안에서 당시 칠원현 내내(奈內 : 현재 칠서면 계내리)로 어머니를 모시고 1618년 가을에 이사를 왔다가 숭정 계유년(1633년) 봄에 기강(岐江 : 지금의 용산리)으로 옮겨왔다고 그가 쓴 [망모암기](望母庵記)에 기록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낙동강변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소정삼간(小亭三間)을 지었는데 그 중 하나는 망모암이라 하였고 그 왼쪽 하나는 사월루(沙月樓)라 하였고 오른쪽 한 칸은 연어대(鳶漁臺)라 하였는데 이를 합하여 합강정사(合江精舍)라 하였는데 여기서 간송선생은 큰 뜻을 품고 가차없이 자신을 필달하면서 숨어살았다.

광해조 때 정인홍이 오랫동안 권세를 잡고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도암(陶庵)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진계(陳戒)의 소를 올리고 마침내 미움을 받아 기강으로 피신, 몸소 고기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한다.

선생께서는 평소 존모(尊慕)하기를 곽망우(郭忘憂) 정동계(鄭桐溪) 이외재(李畏齋) 문모계(文矛溪) 유수암(柳修巖) 허미수(許眉未) 등 제공(諸公)이었는데 서로 도의풍절(道義風節)이 같았다 한다. 1660년 76세 때 망모암을 지었고, 1664년 2월 15일 향년 80세에 타계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천거로 벼슬이 내리기를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이르렀고, 현종 때 어사 남구만(南九萬)의 서계로 행의(行誼)의 표장과 쌀과 콩을 하사 받았으며 후에 사후인 1666년 사림들이 행의순영(行議巡營)에 글을 올려 사헌부지평으로 추증되었고 1721년에 함안 사림들이 상소하여 송정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 송정서원(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이광정이 서문을 쓴 간송집(澗松集)이 있다.

전해 오기는 임금님께서 선생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망모암을 찾아왔더라고 한다. 그런데 선생은 짚신을 삼으며 집에 들어오는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임금님임을 알았으나 짐짓, "선 빚 얻고 후 빚 갚다니!" 하면서 맞았다. 임금님이 하도 기가 막혀,

"낙동강 구구봉(용화산)을 줄까? 낙동강 칠백리를 줄까?" 물었다. 선생께서 구구봉을 달라고 하여 용화산을 하사 받았고 한다. 그래서 용화산 구구봉이 함안 조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