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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초림 2010-10-13 1,571
183.104.49.150


이괄의 난 (1624년 정월)인조2년
이괄은 인조반정(광해군) 때 임시로 대장을 맡아 반란을 주도하여 공이 많았다. 하지만 논공행상(論功行賞)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는데 그쳤다. 그러던 중 1623년 5월 관서지방에 여진족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이괄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에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은 이괄에 대해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1624년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이 반란을 도모하였다는 보고가 인조에게 전달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게 되었다고 전해졌다.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을 역모죄로 잡아 압송하기 위해 의금부 부사가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이괄은 반란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병) 13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인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