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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장현광 선생 문인 조임도 公
초림 2010-10-15 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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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정록(就正錄)-장현광의 문인(門人) 조임도(趙任道)

성명: 장현광[張顯光, 1554~1637]
호 : 여헌(旅軒)
별칭 : 자 덕회(德晦
본관 : 인동(仁同)

여헌선생속집 제9권
부록(附錄)

지난 경자년(1600,선조33)에 임도(任道)는 선군자(先君子)를 모시고 하천리(下川里)에 있는 사촌 자형인 오봉(梧峯) 신공 지제(申公之悌)를 방문하였다. 돌아올 때에 길가의 숲속에 정자(亭子)가 있었는데, 한 마을의 젊은이와 어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오봉공(梧峯公)도 그의 선친(先親)을 모시고 자리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한 대인(大人)이 계셨는바, 얼굴빛이 붉은 것은 물에 담근 듯하고 눈 모양은 단정하여 시선을 함부로 돌림이 없었으며, 말과 행동에 법칙이 있어 조용하고 온화하며 굳세고 깨끗하며 의젓하고 원대하였다. 임도는 온후(溫厚)하고 평이(平易)한 가운데에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지조가 있으며, 공손하고 겸허한 가운데 엄격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氣象)이 있음을 보았다.
임도가 이 때에 비록 댕기드린 어린아이여서 아무런 지식이 없었으나, 마음속에 진실로 특이하게 여겼었다. 돌아와서 선군자에게 여쭈니 답하시기를, “이분은 장 보은(張報恩)이시다. 일찍이 학행(學行)과 유일(遺逸)로 발탁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셨는데, 네가 아직도 기억하느냐?” 하였다.
임도가 선생의 도덕(道德)의 빛남을 접견(接見)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신축년(1601)과 임인년(1602) 사이에 인동(仁同)의 가락동(佳樂洞)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때로 혹 선인(先人)을 모시고 선생의 문하에 왕래하며 종유(從遊)하였다.
하루는 선생이 가락동을 방문하셨는데, 나 임도(任道)를 이 때 기도(幾道)라고 이름하여 불렀었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기(幾)는 가깝다는 말이니, 사람이 도(道)에 가깝게 하는 것도 우연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배우는 자가 뜻을 세우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미진할 듯하니, 마땅히 지극한 경지에 나아감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가까움에 그칠 뿐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군자는 즉시 임(任) 자(字)로 바꾸셨다.

정미년(1607,선조40) 초봄에 선생께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임) 정 선생(鄭先生)을 따라 도흥강(道興江) 가로 와서 노시고는 인하여 망우당(忘憂堂) 곽 우윤(郭右尹 곽재우(郭再祐)를 가리킴)과 서로 모여서 함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노시니, 이웃 고을에서 와서 모인 선비와 친구가 30여 명이었다. 우리 부자(父子) 두 사람도 또한 이 가운데에 참여하였다.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띄우고 노시던 날에 망우당 곽 우윤이 웃으며 한강 정 선생에게 말씀하기를, “나의 소견에는 여헌(旅軒)이 한강보다 낫다.” 하니, 한강 선생은 답하기를, “영공(令公)의 소견이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였다. 우리 고을의 노인(老人)인 작계(鵲溪) 성공(成公)이 나이가 가장 높았는데, 손을 저으며 말씀하기를,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마시오.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마시오. 나는 단지 우리 스승이 있음을 알 뿐이오.” 하였다.
영산(靈山) 사문(斯文) 이외재(李畏齋) 어른은 곽 우윤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영공의 의논은 서하(西河) 사람과 같음이 있다.” 하고는 서로 한바탕 재미있게 말씀하고 파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곽 우윤의 말씀은 질박하여 꾸밈이 없고 한강의 대답은 탁 트여 사사로움과 인색함이 없었으며, 작계가 우선 이러한 말씀을 하지 말라고 한 것과 외재가 서하 사람이라고 배척한 것도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호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사문(斯文)의 성대한 모임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계축년(1613,광해군5)에 임도는 선생을 원회당(遠懷堂)에서 배알(拜謁)하였는데, 선생은 아직 관례(冠禮)를 하지 않은 사자(嗣子)로 하여금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임도가 자리를 피하며 굳이 사양하기를, “이 술잔이 선생에게만 그친다면 자제(子弟)들이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소생(小生)에게도 미친다면 감히 당할 수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비복(婢僕)들로 하여금 대신 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선생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이웃 마을로 옮겨와 사는 것이 좋음을 말씀하셨다.
임도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좋은 지역을 골라 인(仁)한 곳에 처함은 진실로 소원이오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부친께서 이미 별세하시어 묘소(墓所)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다시 분부하기를, “이곳은 강가인데 자네의 선영(先塋)도 물가에 있다 하니, 만약 작은 배 한 척을 장만하여 타고 가서 봄가을로 성묘(省墓)한다면 왕래가 매우 편할 것인바, 어찌 불가(不可)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도는 일어나 절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으나, 끝내 결단하지 못하였다. 노년에 이르러 생각하니, 항상 평생의 후회가 된다. 하류(下流)에 거하는 것을 달게 여겨서 귀먹고 눈먼 것을 면치 못하고 이제 백발이 분분하니, 슬피 한탄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갑자년(1624,인종2) 가을에 선생을 부지암(不知巖)에서 배알하였는데, 이 때 임도가 삼년상을 마친 지 해가 넘었으나 묘소를 옮겨 다시 장례(葬禮)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 때까지도 상복을 벗지 않았었다.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옛날 민자건(閔子騫)이 상(喪)을 마치고 공자(孔子)를 뵈올 적에 거문고를 당겨 타면서 매우 애처롭게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만드신 예(禮)라서 감히 더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군자(君子)로구나.’ 하였다. 그러하니 선왕이 만드신 예(禮)를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묘소를 옮겨 다시 장례하게 되면 그때 가서 평상시와 다르게 하면 되는바 이는 따로 규례(規例)가 있으니, 이로 인하여 상제(喪制)를 넘어서는 안 된다. 또 이처럼 괴롭게 하는 일은 상주 자신에게 있어서는 지극한 효성(孝誠)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밖에서 보면 사람들이 혹 의심할 것이니, 이 또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해 서로 만났을 때에 일찍이 말해 주고 싶었으나 자네의 남은 슬픔이 다하지 않았음에 감동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오늘날은 또한 너무 지나치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말해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임도는 선생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여 돌아와서 아내와 누이와 함께 일시 변통하고는 글을 올려 회보(回報)하였으며, 또 선생이 여러 번 임금의 소명(召命)을 받았단 말씀을 들었으므로, 겸하여 어리석은 소견을 아뢰었다.

경민(景閔)이 《심경부주(心經附註)》의 의심스럽고 잘 모르는 부분을 가지고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은 그를 위하여 논설하시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나도 《심경(心經)》에서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는 곳이 많으니, 어록(語錄)과 같은 따위가 이것이다. 중국(中國)에 어록이 있음은 우리 나라에 시속의 말이 있는 것과 같으니, 선유(先儒)들이 어록을 언해(諺解)한 것이 혹 세상에 많이 유행하나, 애당초 중국 사람에게 질정(質正)하여 안 것이 아니요, 다만 문세(文勢)의 귀추(歸趨)와 향배(向背)를 따라 해석했을 뿐이니, 반드시 본의(本義)에 적절하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몽학(蒙學)의 선비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세상의 학자들은 고원한 것을 좋아하여, 《심경》과 《근사록(近思錄)》이 아니면 남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오직 남의 이목(耳目)에 별다르게 보이려고만 한다. 그리하여 애당초 몸을 닦는 큰 방법과 덕(德)에 들어가는 규모가 사서(四書)와 《소학(小學)》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할 만하다. 배움은 간절하고 가까워야 하며 범범하고 먼 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으니, 너와 같은 만학(晩學)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익숙히 읽는 것이 좋다.” 하였다.
하루는 임도가 선생께 여쭙기를,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니,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이요, 《대학(大學)》의 본의를 부연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이는 어째서입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천지(天地)의 안에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이 모두 《대학》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대학》 밖에 따로 만물이 없는데, 《대학연의》 가운데에는 허다한 조목이 여러 이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어찌 《대학》의 뜻을 부연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겠는가. 또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를 가리킴)이 이 책을 저술한 것은 본래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니, 어찌 권면하고 경계함을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임도에게 연치(年齒)가 얼마냐고 물으시기에 대답하기를, “금년에 40세입니다. 옛사람이 의혹하지 않고[不惑] 마음을 동요하지 않은[不動心] 때이온데, 한결같이 공허(空虛)하여 학문에 향방(向方)을 모르오니 헛되이 일생을 지냄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내 들으니 늦게 공부한 자가 비로소 원대한 경지에 도달한다 하였으니, 학문을 함은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노력하여 스스로 한계짓지 말라.” 하였다.

선생이 임도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논어》 20편을 집주(集註)까지 아울러 정밀(精密)하고 익숙하게 읽으면 학문에 공효(功效)를 얻음이 매우 많다고 한다.” 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평소 체험하여 공효를 거둔 것을 가지고 후생(後生)을 위하여 말씀하셨으나, 겸손한 덕을 간직하시어 오히려 스스로 주장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내 들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른바 “적심(赤心)의 한 조각 한 조각을 가져다가 남에게 말해 준다.”는 것이 이것이다.

을축년(1625,인조3) 가을에 임도가 종형(從兄) 희도(熙道)를 따라 선생을 원회당(遠懷堂)에서 배알하였는데, 선생은 종형에게 말씀하기를, “평소 경환(景煥 희도의 자(字))을 만날 때에도 기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오늘의 기쁨은 전일보다 배나 되니, 이는 치원(致遠 조임도(趙任道)의 자)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도는 선생을 모시고 한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선생은 종형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치원은 말이 천리(天理)에서 나오니, 나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쏠리지 않은 적이 없노라.” 하였다.
임도가 사양하고 공손히 피하였는데, 후일 선생의 말씀을 가지고 반저(潘渚) 장장(張丈)께 여쭈었더니, 말씀하기를, “선생께서 천리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신 것은 말이 모두 진실하고 분명하여 말을 돌리거나 꾸밈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경오년(1630,인조8) 8월 임도가 부지암(不知巖)에 있었는데, 수암(修巖) 유계화(柳季華 유진(柳袗)을 가리킴)가 마침 왔다가 비 때문에 체류하여 함께 선생을 모셨다.
임도가 중국에 상례(喪禮)가 크게 무너지고 탐욕하는 기풍(氣風)이 크게 번성하여 그 병폐를 구원하기 어려움을 말하고, 인하여 말씀드리기를, “이러한 화(禍)는 육상산(陸象山)과 선학(禪學)이 천하를 온통 뒤덮은 폐단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정색하고 말씀하시기를, “우리들의 역량으로 어찌 중국까지 걱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다할 뿐이다.” 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하실 적에 오로지 자신에게 돌이켜 요약(要約)함을 지키는 데에 힘을 쓰시어, 범연히 묻고 멀리 고원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자들의 큰 병통으로 여기신 것이었다. 나는 두려워하고 부끄러워 위축되어서 감히 다시 말씀드리지 못하였다.
선생은 또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자가 만일 먼저 큰 것을 확립한다면 외물(外物)이 빼앗지 못하고 부정한 학설이 미혹시킬 수가 없어서, 만 가지 변화를 수응(酬應)함에 자연히 묘용(妙用)이 있다.” 하였다.
임도가 계화(季華)와 다섯 밤을 베개를 나란히 베고 유숙하였다. 계화가 임도에게 말하기를,

“옛날 우리 선군(先君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킴)께서 난리통에 선생을 만나 하시는 행동을 익숙히 보시고는 사랑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고 혼후(渾厚)하여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心醉)하게 한다. 후일 세상의 유명한 학자가 되어서 우리 유학(儒學)의 맹주(盟主)가 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시고는, 마침내 나에게 명하여 선생께 수학(受學)하게 하였다. 나는 《논어》 약간 편을 배웠으나 끝마치지는 못했다.”
하였다. 임도가 말하기를,

“제가 선생을 보건대 덕행(德行)과 충신(忠信)의 실제는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함이 없고, 대중(大中)하고 지정(至正)한 학문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을 잘 알지 못하는 외부 사람들은 혹 선생이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의심하니, 이 의논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이에 계화가 대답하기를,

“외부 사람이 그 누가 감히 선생의 흉금과 도량을 엿볼 수 있겠는가. 영기(英氣)가 매우 일에 해로우니, 규각을 어디에 쓰겠는가. 기미를 앎이 신묘하다는 말은 《주역(周易)》에 나와 있고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전한다는 말은 《시경(詩經)》에서 읊고 있으니, 침묵을 지켜 몸을 용납함이 말세에 대처하는 지혜이다.”
하였다.
내가 서애(西厓) 부자(父子) 양현(兩賢)의 몇 마디 말씀을 보니 거의 선생을 알았다고 할 만하며, 계화의 의논은 더욱 명쾌하고 친절하였다.

계화(季華)가 하루는 선생께 여쭙기를,

“영남(嶺南)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부모를 개장(改葬)할 때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시마(緦麻) 3개월복을 입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만 흰 띠와 흰 두건을 사용하옵는바, 이미 풍속이 되어서 갑자기 바꿀 수 없사오니, 이것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남의 일은 내가 감히 상관할 수 없거니와 가령 나 자신이 이 일을 당한다면, 어머니에 대해서도 시마복(緦麻服)을 입을 것이다.”
하시니, 유군(柳君)은 ‘예’ 하고 물러갔다.
후일에 또다시 여쭙기를,

“서낙재(徐樂齋 서사원(徐思遠)을 가리킴)가 일찍이 중용(中庸) 두 글자를 해석하여 이르기를 ‘중(中)이 곧 용(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까?”
하자,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이것은 옳지 않다. 정도(正道)와 정리(定理)는 비록 일찍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나 또한 어찌 조그마한 차별이 없이 모호하게 하나로 합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절충하여 중(中)과 용(庸)이라고 하는 것이 병폐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계화(季華)가 또다시 여쭙기를,

“조사(朝士) 중에 이가(李哥) 한 사람이 역학(易學)으로 유명하온바, 《주역(周易)》 사괘(師卦)의 상륙효(上六爻)를 해석하여 이르기를, ‘대군(大君)이 천명(天命)을 소유하고서 이 효(爻)를 만나면 이 효의 뜻을 따라 집과 나라를 열 수 있으나소인(小人)은 비록 이 효를 만나더라도 쓰지 말아야 하니, 이는 건괘(乾卦)의 초구효(初九爻)에 「잠겨 있는 용(龍)이니 쓰지 말라.」 한 것과 같은 뜻이다.’ 하였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이것이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을 총결(總結)한 말이라면 혹자의 말이 옳을 듯하나, 이것은 바로 상효(上爻)의 마지막 말이다. 효(爻)에는 각기 상(象)이 있는데, 상에 이르기를, ‘대군이 명(命)을 내림은 공(功)을 바로잡는 것이요, 소인을 쓰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혹자의 말과 같다면 또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뜻과도 부합하지 않을 듯하다. 이 의논은 근거가 없는 듯하다.”
하였다.

신미년(1631,인조9) 여름에 선생을 뵈오니, 선생은 상소(上疏)한 글과 임금의 비답(批答)을 임도에게 맡겨서 참의(參議) 이윤우(李潤雨) 어른께 갖다 드리게 하였다. 이 때에 국가에서 추숭(追崇)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강력히 간하였는바, 이장(李丈)이 그 비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선생이 보내신 것이었다.

갑술년(1634) 겨울에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들으니 근간에 그대를 재랑(齋郞 참봉을 가리킴)에 제수하는 조처가 있을 듯하다 하니, 사은 숙배(謝恩肅拜)하러 가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 어떻게 처리하려 하는가?”
하기에, 임도는 대답하기를,

“노년(老年)에 자식이 없어서 이 한 몸 이외에는 따로 제사를 대행(代行)할 자가 없사오니, 차라리 성조(聖朝)에 죄를 지을지언정 먼 지방에 붙여 벼슬하느라 선인(先人)의 향화(香火)를 오랫동안 올리지 못하는 불효(不孝)의 죄를 거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에는 한번 상소를 올려 진정(陳情)하여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한 말씀을 올려서 몸을 바치는 것을 대신하여 사은(謝恩)하는 것으로 삼으려 하옵는바, 이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선생이 손수 책상 위에 있는 《화담집(花潭集)》을 꺼내 주시므로 무릎을 꿇고 받아서 읽어보니, 문집 속에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에게 올리려 한 상소문 한 편이 있었다. 이는 화담(花潭)이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있을 때에 초(草)한 상소문인데 올리지는 않은 것이었다. 선생의 뜻은 상소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시지 않았으므로 참고하게 하신 것이었다.

병자년(1636) 겨울에 임도가 선생을 인동(仁同)의 학교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상사(上舍 진사를 가리킴) 장태래(張泰來)가 여쭙기를,

“선생께서 저술한 《우주설(宇宙說)》, 답동문(答童問), 경위설(經緯說), 태극설(太極說) 등을 한결같이 깊이 감추시어 외인(外人)들이 엿볼 수 없으며, 문인 소자(門人小子)들도 실마리를 얻어들은 자가 없사오니, 어찌하여 선생은 이리도 굳게 감추고 은폐하십니까?”
하자,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내가 깊이 감추어 두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노년이 된 지금 오히려 자신할 수 없으므로, 오직 생각하기를 소견이 혹 자라나고 터득한 바가 혹 새로워지면 고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 때문에 가벼이 내놓지 않는 것이다.”
하니, 장태래는 말하기를,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선생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은 《역전(易傳)》을 이미 완성하고도 오래도록 내놓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다소 진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였으니, 선생이 저술한 글을 내놓지 않는 것도 이러한 뜻입니다.”
하였다.

이 날 임도가 선생께 여쭙기를,

“증자(曾子)가 노둔(魯鈍)함으로써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칭찬을 받으셨는데, 노(魯) 자(字)의 뜻을 주자(朱子)는 ‘둔함’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공자(孔子)가 별세했을 때에 증자의 나이가 겨우 26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뜻을 이미 얻어들었으니,그 노둔함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자질(資質)이 둔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생은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으로는, 둔(鈍) 자(字)의 뜻이 오늘날 노둔하다는 둔이 아니요, 다만 순수(純粹)하고 명예(明睿)하지 못하여 안자(顔子)처럼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 못하는 것인 듯하다.”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오늘 그대와 더불어 공자와 안자의 일을 의논하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어찌하면 매일 이와 같이 서로 문답하여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위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도가 하루는 부지암(不知巖)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여쭙기를,

“맹자(孟子)께서 ‘사람은 누구나 다 요(堯)·순(舜)이 될 수 있다.’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 정(情)으로 말하면 선(善)을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사람들이 선행을 하도록 권면한 뜻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에는 아래에 논한 것은 매우 적당하오나 위에서 논한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옵니다. 이제 문장(文章)은 한 작은 기예(技藝)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이것을 나무를 좀먹는 좀벌레와 전각(篆刻)에 비유하였습니다만 이것도 오히려 집집마다 소유하고 사람마다 배울 수가 없는데, 하물며 대성인(大聖人)의 사업은 넓고 드높아서 곧바로 천지(天地)·일월(日月)과 함께 광대(廣大)하고 고명(高明)함을 함께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좋은 자질은 얻기 어렵고 기질을 변화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맹자께서 논하신 것은 그 이치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에 불과할 뿐이다. 스스로 천부(天賦)가 아름답고 배우는 힘이 지극한 자가 아니면 어찌 용이하게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도가 하루는 부지암(不知巖)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다가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때에 학문이 끊긴 폐해를 언급하여 말씀드리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게 동하여 편안하지 못하고 도심(道心)은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惡)에 흐르기가 쉽고 오직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없어지기가 쉬운 것이니,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가려서 정(精)하게 할 수 없고 지극히 강(剛)한 자가 아니면 잡아서 한결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한 나라와 당 나라 7백 년 사이에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자식으로서 절의(節義)와 청렴(淸廉)을 지키고 충신(忠信)하며 정성스러워서 의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은 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오나, 다만 위태롭고 은미한 즈음을 살펴서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는 공부를 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학문한 것이 기억하고 외고 문장을 짓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질이 아름다운 자가 선인(善人)이 됨에 불과하고 괜찮은 사람이 됨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아름다운 자질을 얻기는 쉬우나 지극한 도를 듣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구나 환한 대낮에 고상한 담론(談論)을 하고 큰소리치기는 쉬우나 그윽하고 어두운 자리에서 경계하고 살피기는 어려우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여기에서 나누어지며 도(道)가 밝아지고 밝아지지 못하는 것과 학문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하니, 선생은 이 말씀을 듣고 감탄하며 말씀하시기를,

“이 말이 매우 좋고 통쾌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날마다 자네와 함께 놀고 거처하면 반드시 자뢰하고 유익함이 많을 터인데, 유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임인년(1602,선조35)에 선생은 이웃 고을의 선비인 친구 두세 명과 배를 띄우고 부지암(不知巖) 아래에서 노셨다. 술이 반쯤 돌자, 선생은 육언(六言)의 짧은 시(詩)를 짓기를,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없으니 / 上有天下無地
이는 어느 경계인가 세상을 초월하였네 / 是何界超世間
세간에는 얼마나 많은 소식 있는가 / 世間幾般消息
구름 밖의 한 기러기 스스로 한가롭네 / 雲外一鴻自閒
하였다. 구름 밖의 한 기러기는 선생이 자신을 비유한 것인바, 이는 선생의 호걸스러운 기운이 드러난 부분이다. 임도는 젊었을 때에 이 시를 매우 좋아하여 도흥강(道興江)의 배에 써 놓고 읊고 감탄하곤 하였다.
선생은 정미년(1607)에 놀러 오셨을 때 우연히 이 시를 배 위에서 보셨는데, 처음 생각에는 부지암에서 타던 배이거나 혹은 도흥강의 상선(商船)일 것이요 시는 한때 같이 놀던 선비들이 쓴 것이라고 여기셨다. 임도가 10여 년 뒤에 그 사유(事由)를 자세히 말씀드렸더니, 선생은 듣고 기이하게 여기셨다.

임도가 하루는 경솔히 여쭙기를, “근자에 세상일을 듣자오니 태평할 조짐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하오니 선생께서 비록 세상에 나가시더라도 손을 댈 곳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한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말씀하시기를, “세상일은 내 듣지 못하였으나 늙고 병들어서 나갈 수 없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였다.
임도가 그 후 생각해 보니, 선생과 같은 높은 지식과 원대한 소견으로 어찌 세상일을 듣지 못하셨을 리가 있겠는가. 이는 바로 이른바 ‘침묵을 지켜 몸을 용납한다’는 것일 것이다.

임도가 여쭙기를,

“근세에 예(禮)를 아는 집안에서 혹 묘제(墓祭)에 밥과 국을 진설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 《가례(家禮)》의 묘제(墓祭) 조에 유식(侑食)하는 한 절차가 없으므로 예를 아는 집안에서 밥과 국을 진설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와 같은 의문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묘제에 밥과 국을 쓰더라도 어찌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도가 다시 여쭙기를,

“일찍이 《가례》 묘제 조의 주(註)를 보니, 주자(朱子)께서 편지로 아들 숙(塾)을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근자에 묘제에 토신제(土神祭)를 지내는 예를 보니 매우 지리멸렬한바, 나는 매우 이것을 두려워하노라. 이미 선공(先公)을 위하여 산림(山林)에 체백(體魄)을 의탁하였다면 그 주인(산신을 가리킴)을 섬기는 자가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이후로는 묘소 앞과 똑같이 채소와 과일과 젓과 포와 밥과 다탕(茶湯)을 각각 한 그릇씩 장만하여 나의 어버이를 편안히 하고 신(神)을 섬기는 뜻을 다해서 높이고 낮춤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주자의 이 편지를 본다면 묘제에 밥과 다탕을 씀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시기를,

“나도 또한 일찍이 이 주(註)를 보았다.”
하였다.

임도가 선생의 문하(門下)에 있은 지가 여러 해였으나 일찍이 선생께서 말씀을 빨리 하고 얼굴빛을 갑자기 변하며 성내시는 용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술을 마시기 전과 술을 마신 뒤에 말씀과 모양이 변함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술로 인하여 더 술을 마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혹은 약간 취하신 뒤에 다소의 호기(豪氣)가 외모에 나타나시어 옛날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의리(義理)를 이끌어 비유하시어, 들으면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몸을 거두고 정돈하시어 엄숙하고 조용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으셨으니, 선생께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가 일정함이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옛날 어떤 승려(僧侶)가 윤화정(尹和靖)이 엄숙하고 정돈하여 일정함이 있음을 보고 말하기를, “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가 어떠한 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또한 이와 같을 줄을 안다.” 하였으니, 임도도 선생에 대해 또한 이렇게 말하노라.

선생은 평생에 약(藥)을 자시지 않고 침구(針灸)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는 한결같이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르며 음식을 절제하고 언어를 삼가며 욕심을 끊고 사려(思慮)를 정돈하는 것을 종신(終身)토록 섭양(攝養)하는 절도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온화한 기운이 충만하고 진원(眞元)의 기운이 고갈되지 않으셨다.
하루는 선생을 모시고 밥을 먹었는데, 선생의 식사하시는 양(量)이 얼마나 되는지를 여쭈었더니 선생은 답하시기를, “젊었을 때에도 반되를 넘지 않았고 노쇠한 나이에도 또한 반되에서 줄지 않는다.” 하였다. 임도가 여쭙기를, “반되 이외에는 한 수저도 더 자실 수 없습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더 먹고 싶으면 못 먹을 것은 없으나 반되 이외에는 더하거나 줄이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면 선생은 음식을 자심에 있어서도 또한 공부가 있으셨던 것이다.

임도가 일찍이 여쭙기를,

“선생께서 도(道)의 경지에 들어가신 차례와 학문하신 요점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학문상에 전혀 얻은 것이 없으며 혹 책을 볼 때에 다소 본 것이 있더라도 즉시 잊어버리고 마니, 어찌 말해줄 만한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시고는, 인하여 말씀하시기를,

“학문한다 학문한다 하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것을 말하겠는가.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왕왕 지엽만을 일삼고 근본을 힘쓰지 아니하여, 혹은 문자에만 힘을 쓰고 혹은 언어에만 매달려서 지식은 혹 유여(有餘)하나 행실이 도리어 미치지 못하며, 강구(講究)하는 것은 자세히 하나 실천하는 것은 소략하다. 그리하여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지 못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돌아보지 못하여, 시(始)와 종(終)이 서로 어긋나고 내(內)와 외(外)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필경 그 사람과 학문이 전혀 서로 비슷하지 않으니, 이는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다.
선유(先儒)들이 말씀하시기를, ‘증자(曾子)의 학문은 성독(誠篤)일 뿐이다.’ 하였으니, 나는 ‘성독’ 두 글자는 배우는 자가 마땅히 표준으로 삼아서 힘을 써야 할 부분이라고 여기노라.”
하였다.

선생은 17, 8세 때에 이미 큰 사업에 뜻을 두시어 곧 옛날의 성현(聖賢)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고 한 가지 선행(善行)과 한 가지 재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으셨다. 손수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찬(撰)하셨는데 그 조목이 모두 열 조항이었는바, 그 끝에 쓰시기를 “능히 천하의 제일가는 사업을 하여야 비로소 천하의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또 옛사람의 좋은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였는바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다.[不重則不威 學則不固]’, ‘온순하면서도 엄하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다.[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바라보면 엄숙하고 나아가면 온화하고 그 말소리를 들어보면 확고하다.[望之儼然 卽之也溫 聽其言也厲]’,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 등의 글자를 써서 책상 위에 두시어 눈으로 주시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시곤 하였다. 임도가 일찍이 엿보아 이것을 알았으니, 선생의 주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선생이 여덟 살 때에 선부군(先府君)인 판서공(判書公)이 별세하였는바, 상주 노릇을 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으며 홀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임진왜란 때 선생이 모친(母親)의 상중(喪中)에 계셨는데 등에 신주(神主)를 지고 유리(流離)하여 숨어 있었으나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상례(喪禮)를 집행하였다. 그리하여 아침, 저녁, 초하루, 보름에 올리는 제물(祭物)을 구비하지 못하면 비록 미음과 죽과 채소와 과일 따위의 하찮은 것이라도 얻는 대로 공경히 올렸으며 반드시 곡하여 슬픔을 다하니, 듣는 자들이 감탄하였다.
선생은 굶주려 곤궁할 때에도 용모가 마르지 아니하여 안색이 윤택하였으며, 종일토록 《주역》을 읽으셨는데 책을 읽는 소리가 일찍이 간단(間斷)하지 않고 기운이 일찍이 쇠하지 않으니, 유식한 자들은 신인(神人)이라고 지목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기질이 후(厚)하고 수양하기를 지극히 훌륭하게 하여, 의리(義理)가 내면에 주장이 되어서 굶주림 때문에 번뇌하지 않으셨으므로 이와 같으셨던 것이다. 주자(朱子)가 연평 선생(延平先生 이동(李侗)을 가리킴)을 칭하여 말씀하시기를, “얼굴이 온화하고 덕스러운 모양이 등에 가득하여 자연 미칠 수 없다.” 한 것이 이것일 것이다.

선생이 난리를 겪으시던 중에 일찍이 청송(靑松) 땅의 산골짝을 지나다가 유숙(留宿)하셨는데, 주인인 촌로(村老)가 봉밀(蜂蜜)을 가지고 와 올리면서 “보약(補藥)에 쓰소서.” 하였다. 선생이 받지 않자 주인이 굳이 청하니, 선생은 우선 받아두었다가 얼마 후 주인을 불러 다시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 물건은 이미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나그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주인에게 주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 관청에 바치는 여러 물건 중에 기름과 꿀이 가장 귀하니, 그대는 이것을 보관하였다가 한 번 관(官)에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주인은 할 말이 없어 그대로 물러갔으니, 선생이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을 구차히 하지 않으심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선생은 평소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검소함을 편안히 여기고 사치함을 끊어서 무릇 비단과 명주 등속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몸에 달지 않으셨다.
거처하시는 집에는 편액(扁額)과 도화(圖畵)가 없고 뜰에는 꽃나무와 관상수가 없었으며, 다만 책상 위에 책 약간 권이 있고 뜰 아래에는 매화(梅花) 두서너 그루가 담박(淡泊)하게 서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은 나가 놀게 되시면 가벼운 행장(行裝) 서너 가지를 챙기셨는데 이르는 곳마다 서로 따르게 하여 자리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는데, 이는 선생이 평소 저술한 문고(文藁) 및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으로서 고증(考證)에 긴요한 것들이었다.

선생은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여기셨으며, 지식과 생각이 세상에 뛰어났으나 말씀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여기시어, 온화하고 공손하고 간략하고 침묵하여 오직 날마다 공경하고 공경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씀을 들으시면 사양하고 피하여 비록 작은 선(善)이라도 자처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항상 미치지 못할 듯이 여기고 덕이 이미 높았으나 더욱 스스로 공손하였다.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한 지 80년 동안 조정의 옳고 그름과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인물의 장단점을 말씀하지 아니하여 광채(光彩)를 감추고 거두어서 안으로 닦으니, 사람들은 선생이 가슴속에 간직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평생의 소견과 얻은 바가 모두 저술한 문자(文字)에 있으니, 이것을 잘 연구하고 자세히 음미하면 거의 그 가슴속에 간직하신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덕스러운 도량이 높고 깊으며 덕스러운 용모가 충실하고 완전하였다. 수염이 드물게 나시고 눈썹이 빼어나 신채(神彩)가 빛나고 가득하였으며, 기질이 후중하고 음성이 크고 안색이 온화하여 위의(威儀)와 풍도(風度)가 엄숙하고 태연하니, 사람들이 바라보면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나이가 젊은 부박(浮薄)한 무리들이라도 선생의 용모와 광채를 바라보면 자연 두려워하여 몸을 검속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아 기질에 조그만 하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씀하고 침묵하고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이 자연히 도리(道理)에 맞았으며, 은둔하고 나타나며 행하고 감춤을 오직 의리에 맞게 하실 뿐이었다. 부귀(富貴)와 작록(爵祿) 보기를 뜬구름이 공중을 지나가는 것처럼 여기시어 덕량(德量)의 끝을 엿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다스림은 엄격하였으나 남을 대함에는 용서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 반드시 취할 만한 실제가 있음을 살핀 뒤에야 허여(許與)하고 남의 훼방과 칭찬에 따라 가벼이 허여하거나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가슴속의 경위(涇渭)의 구분을 얕은 소견으로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임도가 하루는 부지암(不知巖)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이 남명 선생(南冥先生 조식(曺植)을 가리킴)의 높은 부분을 언급하여 말씀하시기를,

“높은 부분[高處]은 단지 작록(爵祿)을 사양하고 풍절(風節)을 세움에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의논이 보통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뛰어넘고 식견이 보통 사람들보다 몇 등급이 더 높아서, 타고난 자품과 학문이 매우 드높아 탁월하다.”
하기에, 임도가 대답하기를,

“선생의 가르치심은 매우 다행이오나 일부 사람들은 고(高) 자에 서운해하니, 지난번 고풍(高風)과 정맥(正脈)의 변론이 이것입니다.”
하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고 자의 뜻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정맥이란 글자에 비하면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른의 높은 부분을 누가 감히 바라 미치겠는가.”
하였다.

임도가 여쭙기를,

“소생(小生)이 사우(師友)들의 망녕된 추대를 받아 신산서원(新山書院) 원장(院長)의 임무를 맡았사온바, 김동강(金東岡 김우옹(金宇顒)을 가리킴)을 서원에 배향(配享)하고자 하오며, 또 《경연강의(經筵講義)》 등의 책을 간행(刊行)하여 반포해서 우리 도학(道學)의 우익(羽翼)이 되게 하고자 하오니, 이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매우 좋다, 매우 좋다.”
하였다. 임도가 또다시 여쭙기를,

“동강(東岡)은 남명(南冥)에게 문인이 되기를 가장 먼저 하였고 또 손자 사위가 되어서 범연히 출입한 다른 분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오니, 한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예(禮)에 또한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옵건대 신송계(申松溪 신계성(申季誠)을 가리킴)가 연향(聯享)하는 위치에 있사온데, 만약 선비들의 의논이 ‘동강은 남명에게 있어 손자 사위이고 문인이니 배향하여 모시는 것이 당연하나, 송계가 동강에 대하여 홀로 편안히 임할 수가 있는가.’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신산서원은 본래 남명을 위하여 만든 것이니, 송계는 객(客)일 뿐이다. 또한 어찌 해롭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송계가 왼쪽에 계시면 동강은 서쪽 귀퉁이에 모시고, 송계가 오른쪽에 계시면 동강은 동쪽 귀퉁이에 모시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하다.”
하였다.

선생은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술이란 물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혈기(血氣)를 화창(和暢)하게 하니, 혈기가 화창하면 맥(脈)이 막히지 아니하여 병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은 덕(德)에 맞게 마시면 이보다 더 좋은 약(藥)이 없지만, 절제하지 하지 않고 마시면 이보다 더 큰 병이 없으니, 다만 사람이 어떻게 참작하여 마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하였다.

선생은 만년(晩年)에 일찍이 인물의 간사하고 바름을 구분하기 어려움을 언급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는 혹 눈동자를 보고서 사람의 간사하고 바름을 구분하였으나, 지금 노쇠한 나이에는 두 눈이 어두워서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니, 하물며 사람의 눈동자의 흐리고 맑음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임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평소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가리킴)을 못 본 것을 항상 한하여 지금까지도 꿈속에서 왕래하기를 마지않는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노쇠함이 너무 심하여 비록 올라가 구경하더라도 멀리 바라볼 수가 없을 것이니, 보아도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서글퍼하노라.” 하였다.

선생은 평소 남이 잘한 것을 듣기 좋아하시고 남이 잘못한 것은 덮어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손님 중에 남의 선행(善行)을 칭찬하는 자가 있으면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빛에 나타나 재미스러워하시고 권태로움을 잊으셨으며, 만약 훼방하고 꾸짖는 말이면 들어도 못 들은 체하시며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오봉(梧峯) 신공(申公)이 일찍이 선생의 아름다운 덕(德)을 임도에게 말하기를, “선생의 덕행(德行)이 내면에 진실함은 비록 옛날 대현(大賢)에게 비교하더라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내 일찍이 선생께서 행장(行裝)을 챙기시는 것을 보니, 뿔송곳과 숫돌과 바늘과 실과 노끈 같은 하찮은 것들도 모두 살펴서 간직하셨다. 일을 처리함이 치밀하여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선생을 찾아와 물으면 선생은 이해(利害)를 자세히 개진하고 양쪽의 단서를 다 말씀하여 명백하고 통쾌하였으며,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평이하고 착실하였다. 비록 기이한 담론과 특이한 의논으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며 사람들을 크게 복종시킬 만한 내용은 없었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이 깨끗이 제거되고 울분이 사라져서 일이 모두 평탄하고 순조로워 원망과 후회가 생기지 않게 하였으니, 이 어찌 충화(沖和)한 기운과 신순(信順)한 덕이 흉중(胸中)에 쌓여서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선조 대왕(宣祖大王) 때에 일찍이 두 번 수령(守令)이 되었으나 모두 근무 고과(考課)를 한 번 하기도 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폐조(廢朝 광해군을 가리킴) 때에는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사례하는 상소문을 올린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성조(聖朝 인조를 가리킴)가 즉위한 이후에 비록 잠시 서울에 이르렀으나 의리가 각각 다른 데 있어서 일찍이 오랫동안 체류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선생이 세상에 나아가고 은둔한 대략인데 한결같이 의리를 따르고 구차히 하지 않았다.
비록 지위가 정경(正卿)에 올랐으나 일찍이 녹(祿)을 받고 봉직(奉職)하지 아니하여 털끝만큼도 얽매임이 없었다. 그리하여 거취와 진퇴의 즈음에 여유 작작하여 거센 물결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지주(砥柱)처럼 무게가 있었으며, 천 길 높이 나는 봉황새와 같았다.

임도가 비록 선생에게 일찍이 경서(經書)를 잡고 수업을 청하지는 않았으나 문장(門牆)을 출입하여 보고 감동함은 많았다. 선생의 말씀하고 침묵하고 동(動)하고 정(靜)하심을 보면 선생이 도(道)를 체득한 묘함을 징험할 수 있으며, 선생의 기모(氣貌)와 용색(容色)을 보면 선생이 덕(德)을 기르신 실제를 징험할 수 있으며, 선생의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심을 보면 선생이 경(敬)을 간직하기를 익숙히 하신 것을 징험할 수 있으며, 선생의 물건을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심을 보면 선생이 의(義)를 헤아리기를 정밀히 하셨음을 징험할 수 있었다.
곤궁하고 유리(流離)하는 즈음에 조행(操行)의 바름을 볼 수 있으며, 명리(名利)와 작록(爵祿)의 즈음에 풍절(風節)의 굳셈을 볼 수 있으며, 파도가 일렁이고 바람이 쏠리는 즈음에 다리 힘의 견고함을 볼 수 있었다. 임도는 이것을 좋아하여 배우기를 원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