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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와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1.시조와 본관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始祖)는 휘(諱) 정(鼎)이시다. 고려조(高麗朝)에 원윤(元尹)1)의 벼슬을 하셨고 후손(後孫)이 함안(咸安)2)에 정착(定着)하여 대대(代代)로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삼았다.
2.사대보(四大譜)의 기록(記錄)
(1)조선(朝鮮) 현종(顯宗) 5년 갑진년(甲辰年:1664)에 간행(刊行)된 함안조씨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인 "갑진보(甲辰譜)"에는 "시조께서 신라원윤(新羅元尹)"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2)영조(英祖) 14년 무오년(戊午年:1738)에 간행된 "무오보(戊午譜)"에는 "고려 대장군 원윤(高麗 大將軍 元尹)"으로 수정(修正)되었으며 주서(註書)하기를 "고찰(考察)해 보니 이전(以前)의 보첩(譜牒)에는 신라원윤이라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집안에 소장(所藏)된 기록 중에 고려조에 벼슬을 하셨다"하였고 또한 시조의 9대손(代孫)인 전서공(典書公)3) 諱 열(悅) 대(代)에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었으니 신라 말부터 고려 말에 이르는 약(約) 500백년 사이에 대수(代數)가 10대(始祖-典書公) 밖에 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원윤이란 관직(官職)은 고려조의 관직명(官職名)인 즉 고려 원윤임이 의심(疑心))되지 않아 이렇게 기록한다. 후일(後日)에 다시 살펴보기를 바란다[按舊譜稱新羅元尹家藏舊錄中曰仕於高麗末知孰是而自公九傳而至典書公入本朝自新羅歷麗朝五百年其間代數必不止於九世且元尹之職乃麗朝官名則公之仕於麗朝似無疑故今書以仕高麗以俟後日更考]
(3)정조(正祖) 4년 경자년(庚子年:1780)에 간행된 경자보(庚子譜)와 순조(純祖) 25년 을유년(乙酉年:1825)에 간행된 "을유보(乙酉譜)"에도 위의 사실(事實)을 그대로 기재(記載)하고 있다.

3.기미보(己未譜:1979年)의 기록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는 정(鼎)이요. 자(字)는 우보(禹寶) 호(號)는 모당(慕唐)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으로 중국(中國)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新羅) 말(末)에 동생 부(釜)와 당(鐺)을 데리고 절강(浙江)사람 장길(張吉)과 함께 귀화(歸化)하여 고려개국벽상일등공신(高麗開國壁上一等功臣)4)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고. 왕건(王建)을 도와 합주(陜州:지급의 陜川)에서 기의(起義) 태조(太祖) 14년 고창성(古昌城:지금의安東)에서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 대부분(大部分)을 항복(降伏)받아 고려 통일(統一)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함안(咸安)에 세거(世居) 본관(本貫)을 함안으로 하였다. 고창(古昌:安東)의 칠현사(七賢祠)와 동수(桐藪:大邱東區智妙洞)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祭享)한다. 라고 기미보(己未譜)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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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윤(元尹) : 고려 초기에 십육관계(十六官階) 가운데 십위(十位), 정오품(正五品)에 해당하는 것으로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직후에 태봉의 관계(官階)를 본떠서 919년에 두었다.
2) 함안(咸安) : 함주지에 함안의 명칭이 아시량(阿尸良),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주(咸州), 금라(金羅), 사라(沙羅), 파산(巴山)으로 기록되어있다.
3) 공조전서(工曹典書) : 고려 충열왕(忠烈王) 34년(1308)에 둔 선부, 민부, 언부의 長, 조선초기 육조(六曹)의 長官, 태종(太宗) 5년(1405)에 판서(判書)로 고침.
4) 벽상공신(壁上功臣) : 고려시대 공신(功臣)에게 내린 칭호(稱號)로서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 조>에 처음 나타난다. 태조(太祖) 19년(936)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한 뒤 940년에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동서벽(東西壁)에 삼한공신(三韓功臣)의 모습을 그렸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 벽상공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由來)한 것이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때 명종(明宗)이 무신난(武臣亂)의 주동자(主動者)들에게 내린 예(例) 외에는 없다.

정(鼎)의 아들 간(幹)이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5)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시우(時雨)는 오위도령장(五衛都領將), 영준(英俊)은 형부상서(刑部尙書)6)를 지냈다. 6대 열(烈)은 광정대부정당문학(匡靖大夫政堂文學)7) 7대 희(禧)는 밀직사삼사좌윤(密直使三司左尹)8) 9대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9) 휘(諱) 천계(天啓), 10대 열(悅)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안경(安卿)은 호조전서(戶曹典書)10)에, 11대 승숙(承肅)은 부여감무(夫餘監務)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조(高麗王朝)에서 대대(代代)로 고관대작(高官大爵)에 봉직(奉職)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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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랑장(中郞將) : 고려시대 정오품의 무관 벼슬.
6) 형부상서(刑部尙書) : 형부는 고려시대에 육부(六部) 가운데 법률, 소송, 재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상서는 육부의 으뜸벼슬. 고려 성종14년(995)에 어사(御事)를 고친 것으로 정삼품이며 뒤에 판서(判書). 전서(典書)로 고침.
7) 광정대부정당문학(匡靖大夫政堂文學) : (1)광정대부는 고려시대에 둔 정이품 문관의 품계로 충열왕 1년(1275)에 금자광록대부를 고친 것이다. (2)정당문학은 고려시대에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이품 벼슬로 뒤에 참문학사로 고침.
8) 밀직사삼사좌윤(密直使三司左尹) : (1)밀직사는 고려시대에 왕명의 출납(出納)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기밀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2)삼사는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3)좌윤은 삼사에 속한 종삼품 벼슬로 공민왕 11년(1362)에 두었다.
9)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 (1)봉익대부는 고려때 종이품(下) 문산계. 1310년(충선왕2)에 제정되고 1356년(공민왕5)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1362년에 다시 봉익대부로 고침, 1369년 종이품(上)으로하며 영록대부로 다시 고쳤음 (2)판도판서는 고려 중엽의 관직의 하나로 판도사(版圖司)의 長. 31대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뒤에 호조전서(戶曹典書)로 고치고 조선 태종(太宗) 때에 호조판서(戶曹判書)로 고침.
10) 호조전서(戶曹典書) : 전항(前項) 9)참조(參照)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 모은 이오(茅隱 李午)만은 홍재(晩隱 洪載) 등과 평소(平素) 친교(親交)하시면서 은둔(隱遯)하셨으며 공양왕(恭讓王) 4년 임신(壬申)에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고 왕이 되자 전서공 열(典書公 悅) 고죽재공 안경(孤竹齋公 安卿) 덕곡공 승숙(德谷公 承肅) 등 선조께서는 고려 말 충신으로 두문동 제현(杜門洞 諸賢)과 두문동에서 기거(起居)하셨거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셨다. 이성계(李成桂:太祖), 이방원(李芳遠:太宗)이 회유(懷柔)하였으나 절개(節槪)를 굳게 지키심이 은(殷)나라 백이숙제(伯夷叔齊)에 비유(比喩)되는 정충대절(貞忠大節)은 역사(歷史)에 길이길이 빛나고 있다.
4.기타(其他) 기록
(1)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11)
1927년에 간행되었으며 "공의 이름은 정(鼎)이고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號)는 모당(慕唐)이다. 본래(本來)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 시절(時節)에 부(釜)와 당(鐺) 두 아우와 함께 고려로 와서 함안조씨(咸安趙氏)가 되었으며 고려조에는 대장군원윤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공(功)을 세웠으며 시호(諡號)12)는 충장(忠壯)"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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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 저자 이장훈(李章薰) 편 연활자본(鉛活字本) 2책 1926년 간행, 서(序) 송영대(宋榮大) 자서(自序) 이장훈, 발(跋) 세을축(歲乙丑:1925년) 이승욱(李承旭)
12) 시호(諡號) : 시호는 나라에 기여한 공을 기리기 위해 돌아가신 분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호(號)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돌아가신 분은 물론 가문에 있어 가장 큰 영예(榮譽)로 여겼다. 시호는 중국 주(周)나라 때 시법제도(諡法制度)가 처음 시행된 것이 시원(始原)이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한 때 폐지(廢止)되었다가 한(漢)나라 때부터 다시 시행되어 청(淸)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년(514)이 죽은 부왕(父王)에게 “지증(智證)”의 증시(贈諡)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초기에(朝鮮初期)는 왕과 왕비(王妃), 종친(宗親), 실직(實職)에 있었던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문무관(文武官)과 공신(功臣)에게만 시호가 주어 졌으나 후대(後代)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對象)이 확대(擴大)되었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는 194자로 한정(限定)하였으나 봉상시(奉常寺)의 건의(建議)에 107자를 첨가(添加)하여 301자를 쓰게 되었다.
함안조씨 중에는 덕곡선생(德谷先生) 휘(諱) 승숙(承肅)께서 받았다는 문경(文敬)의 시호는 확인된 문헌(文獻)이 없으며 어계선생(漁溪先生) 諱 려(旅)께서 정절(貞節),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 諱 종도(宗道)께서 충의(忠毅), 諱 중회(重晦)께서 충헌(忠憲)의 시호를 받으셨다.

(2)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13)
유사遺事)에는 "공은 후당(後唐) 희종(僖宗) 12년 정사년(丁巳年:897)에 태어나 지혜(智慧)는 천명을 능가(凌駕)했으며 신장(身長)은 팔척(尺)이나 되었다. 당(唐)나라가 태평(太平)하여 너무나 무료(無聊)하고 한탄(恨歎)하다가 동방(東邦)에 난리(亂離)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 병술년(丙戌年:926)에 절강성(浙江省)의 장길(張吉)과 함께 무장(武裝)을 갖추고 귀화(歸化)하여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결의(結義)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7형제(兄弟)라 하였다.

처음 고려왕(高麗王)을 송도(松都)에서 만났을 때 왕건(王建)은 궁예(弓裔)의 신하(臣下)였으나 장차 (將次)왕건이 왕이 될 것을 짐작(斟酌)하고 그를 도우겠다는 약속(約束)을 한 후 돌아왔다. 공은 합주(陜州:지금의 陜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은 안동(安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왕건이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적(賊)에게 포위(包圍)를 당(當)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3,000여명의 군사(軍士)를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 동수(桐藪)에 도착하니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전사(戰死)한 뒤였기에 견훤(甄萱)과 전투(戰鬪)하면서 왕건을 호위(護衛)하여 송악(松岳)에 도착(到着)했다.

경순왕(敬順王) 신묘년(辛卯年:931)에 견훤을 안동에서 크게무찔러 동경고을 일백십 여 성(城)으로부터 모두 항복(降伏)을 받으니 고려 태조(太祖)는 공을 대장군 원윤으로 삼고 개국벽상일등공신(開國壁上一等功臣)으로 봉(封)했다.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趙鼎)과 장길(張吉)은 한(漢)나라의 조자룡(趙子龍)과 장비(張飛:張益德)와 같으니 당(唐)나라로서는 불행(不幸)한 일이나 나로서는 큰 복(福)"이라 했다. 고창(古昌:安東) 칠현묘(七賢廟)와 桐藪(大邱)의 충렬사(忠烈祀)에 배향(配享)하였다. 출처(出處)는 <조씨가장(趙氏家藏)>이라고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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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 : 신라(新羅) 이래 유학(儒學)의 정착(定着) 발전에 공헌(貢獻)이 큰 유학자들을 모아 그들의 행적(行蹟)과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다. 권수(卷首) 의 지(識)에서 퇴계선생이 칭(稱)한 제현(諸賢:설총 등 16인과 그 문인 종유(從遊), 기타 절의(節義), 훈공(勳功) 등 제가언행(諸家言行)과 유문(儒門)의 사업을 모아 만들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 이병관(李炳觀) 편(編), 발행 경성(京城) 대성학회(大聖學會) 1927년.

(3)결론(結論)
기미보(己未譜)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의 위와 같은 기록은 갑진보(甲辰譜) 무오보(戊午譜) 경자보(庚子譜) 을유보(乙酉譜)의 사대보(四大譜)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으며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을 비롯한 고려건국(高麗建國)에 관한 역사기록(歷史記錄) 어디에도 찾지 못했으며 조씨가장(趙氏家臟)이라 하였으나 역시(亦是) 이 기록들을 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