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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육신(生六臣)

諡號順
시호순
位牌順
위패순

本貫
본관

諡號
시호
諡號日
시호일
時代
시대
生卒
생졸
趙 旅
조 려
2 主翁
주옹
咸安
함안
漁溪
어계
貞節
정절
1781.11.20. 正祖5
정조
1420-1489
李孟專
이맹전
1 伯純
백순
碧珍
벽진
耕隱
경은
靖簡
정간
1782.10.05. 正祖6
정조
1392-1480
成聃壽
성담수
5 耳叟
이수
昌寧
창녕
文斗
문두
靖肅
정숙
1784.03.11. 正祖8
정조
1450년
進士試
金時習
김시습
4 悅卿
열경
江陵
강릉
梅月堂, 東峰
매월당, 동봉
淸寒子,贅世翁
청한자, 췌세옹
淸簡
청간
1784.03.11. 正祖8
정조
1436-
1493
南孝溫
남효온
6 伯恭
백공
宜寧
의령
秋江, 杏雨
추강, 행우
文貞
문정
1784.03.11. 正祖8
정조
1454-1492
元 昊
원 효
3 子虛
자허
原州
원주
觀瀾, 霧巷
관란, 무항
貞簡
정간
1784.03.11. 正祖8
정조
1396-1464


註 : 耕隱 李孟專先生에게 正祖5年(1781年9月21日庚申) 貞穆이란 諡號를 允許,○正祖5年(1781年11月20日戊午) 貞穆의 諡號를 내림,○正祖5年(1781年11月21日己未)에 李孟專 諡號의 末望은 仁顯王后의 徽號라 削號되고 다음해 靖簡의 諡號를 내렸음.

2. 생육신에게 시호(諡號)를 내림

1) 시호(諡號) : 시호는 나라에 기여(寄與)한 공(功)을 기리기 위해 돌아가신 분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호(號)이다. 따라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돌아가신 분은 물론 가문(家門)에 있어 가장 큰 영예(榮譽)로 여겼다. 시호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때 시법제도(諡法制度)가 처음 시행(施行)된 것이 시원(始原)이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한 때 폐지(廢止)되었다가 한(漢)나라 때부터 다시 시행되어 청(淸)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년(514)에 죽은 부왕(父王)에게 “지증(智證)”의 증시(贈諡)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초기에는 왕(王)과 왕비(王妃), 종친(宗親), 실직(實職)에 있었던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문무관(文武官)과 공신(功臣)에게만 시호가 주어 졌으나 후대(後代)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對象)이 확대(確大)되었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數)는 194자로 한정(限定)하였으나 봉상시(奉常寺)의 건의(建議)에 107자를 첨가(添加)하여 301자를 쓰게 되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중에는 덕곡선생(德谷先生) 휘(諱) 승숙(承肅)께서 받은 문경(文敬)의 시호는 확인(確認)된 문헌(文獻)이 없으며 어계선생(漁溪先生) 諱 려(旅)께서 정절(貞節),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 諱 종도(宗道)께서 충의(忠毅), 諱 중회(重晦)께서 충헌(忠憲)의 시호를 받으셨다.

2) 생육신의 시호 (朝鮮王朝實錄)

1)正祖 5年 辛丑(1781年)11月20日 諡號를 내렸는데, 判書 任有後에게는 貞僖를, 贈判書 趙旅에게는 貞節을 以下 省略.(國朝實錄 12冊12卷64章)

贈諡判書任有俊貞僖, 贈判書趙旅貞節, 贈左贊成成金王言 愍肅, 贈瀛昌君沉靖僖, ....以下省略

(貞節(淸白守曰貞好廉自克曰節:淸白을 스스로 지킨 것을 貞이라 하고 廉潔을 좋아하며 스스로 이긴 것을 節이라 하였음)

註 : 正祖5年(1781年9月29日) 趙旅에게 貞節이란 諡號를 允許함(12冊12卷35章B面)

2)正祖 6年 壬寅(1782年)10月5日 金鐘秀를 漢城府 判尹으로 中略......... 贈判書 李孟專에게는 靖簡이란 諡號를 내렸다. (國朝實錄 14冊14卷20章)

以金鐘秀爲漢城府判尹, 具善復爲刑曹判書, 徐有防爲成均館大司成, 贈諡判書金雲澤忠貞, 贈判書李孟專靖簡

3)正祖 8年 甲辰(1784年)3月11日 이갑을 兵曹判書로 中略-----.吏曹判書로 追贈된 成聃壽에게는 靖肅을 -----.吏曹判書에 追贈된 金時習에게는 淸簡을, 吏曹判書에 追贈된 南孝溫에게는 文貞을-----.直提學 元昊에게는 貞簡을........이란 諡號를 내렸다.(國朝實錄 17冊17卷25章)

以而甲爲兵曹判書, 尹師國爲司憲府大司憲, 旌遞, 李在協代之, 沈豊之爲司諫院大司諫, 贈諡右議政鄭弘淳靖敏, 贈吏曹判書成聃壽靖肅, 贈吏曹判書李瀣貞愍, 贈吏曹判書金時習淸簡, 贈吏曹判書南孝溫文貞, 贈戶曹判書朴毅長武毅, 直提學元昊貞簡, 知中樞府事權樀孝貞

註 : 正祖6年(1782年)4月19日 成聃壽, 金時習, 元昊, 南孝溫에게 吏曹判書를 追贈함.

3. 생육신 사적(生六臣 事蹟)

1) 정간공 이맹전(靖簡公 李孟專)

1392年(太祖1)-1480年(成宗11) 조선 단종(朝鮮端宗) 때 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백순(伯純), 號는 경은(耕隱), 시호(諡號)는 정간(靖簡), 본관(本貫)은 벽진(碧珍), 선산(善山)출신, 병조판서 심지(兵曹判書審之)의 아들, 어머니는 공조전서 여극승(工部典書呂克勝)의 딸이다. 代代로 성주(星州)에서 살았으며 그의 선친(先親) 심지(先親審之) 때부터 선산군 남면 형곡촌(善山郡南面荊谷村)으로 이거(移居)했다. 1427年(世宗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及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부자(父子)와 平生을 가까이 지냈다.

승정원 정자(承文院 正字),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소격서령(昭格署令) 等을 역임(歷任)한 後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낼 때 청백(淸白)으로 소문이 났으나 1453年(端宗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等과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단종(端宗)을 보좌(補佐)하는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等 대신(大臣)을 죽이고 득세(得勢)하자 1454年(端宗2) 벼슬을 버리고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고 핑계하며 고향(故鄕)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여생(餘生)을 마치었다.

영의정 서명선(領議政 徐命善)의 건의(建議)로 1782年(正祖6)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정간(靖簡)의 시호(諡號)도 내려졌다. 충남 공주 숙모전(忠南 公州 肅慕殿), 경북 영천 용계서원(慶北 永川 龍溪書院)과 경남 함안 서산서원(慶南 咸安 西山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하고 선산 월암서원(善山 月巖書院)에도 김주(金澍), 하위지(河緯地)와 배향(配享)하고 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경상북도영천시자양면용산리(慶尙北道永川市紫陽面龍山里)에 있으며 1684年(肅宗10) 용계사(龍溪祠)로 창건(創建),하였으며 1786年(正祖10)서원승격(書院昇格)되어 사액(賜額)되었다., 1871年(高宗8)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어 1945年 복원(復元)하였다, 1976年 현 위치(現 位置)로 이건(移建)되었으며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을 춘분(春分) 추분(秋分)에 봉향(奉享)한다.(耕隱實記.)

2) 정절공 조려(貞節公 趙 旅)

1420年(世宗2)-1489年(成宗20) 조선 단종(朝鮮 端宗) 때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주옹(主翁), 號는 어계(漁溪),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본관(本貫)은 咸安, 1453年(端宗1)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명망(名望)이 높았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王이 되자 고향(故鄕)의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1456年(世祖2丙子) 6月 28日 단종(端宗)이 청령포(淸泠浦)로 유배(流配)되자 원호(元昊), 이수형(李秀亨)과 치악산(雉岳山) 무릉리(武陵里) 入口에 제명록(題名錄)을 세우고 단종(端宗)의 만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祈願)했다.

1457年(世祖3丁丑) 10月 24日 端宗이 유배지(流配地)에서 승하(昇遐)하였음을 듣고 咸安에서 오백여리(五百餘里) 길을 주야(晝夜)로 달려 청령포(淸泠浦)에 당도(當到)하니 배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통곡(痛哭)하니 하늘도 울더라, 의복(衣服)을 벗어 등에 지고 江을 건느러 하자 옷을 당기는지라 뒤를 돌아보니 범이었다. 公이 말하기를

“천리분상(千里奔喪)에 이 江을 건너지 못하도다. 이 江을 무사(無事)히 건너면 상감(上監)을 수렴(收斂)할 것이오, 건너지 못하면 창해(滄海)의 물 귀신(鬼神)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당기는고“ 하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므로 公이 그 뜻을 짐작(斟酌)하고 등에 엎혔드니 마침내 나루를 건너 주어서 시소(尸所)에 들어가 보니 수직(守直)하는 두 사람뿐이더라. 통곡사배(痛哭 四拜)한 後 옥체(玉體)를 수렴(收斂)하고 門을 나오니 범이 다시 江을 건너 주었다.(강원도지:江原道誌, 영월읍지:寧越邑誌, 남추강시:南秋江詩)

世祖三年丁丑(1457) 十月 二十四日 노산군(魯山君)이 배소(配所)인 영월(寧越)에서 사사(賜死)되자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의 육신단상(六臣壇上)에 “품:品”자형(字形)으로 일단(一壇)을 만들어 통곡제지(痛哭祭之)하였다 초혼칠신(招魂七臣)(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려:趙旅, 성희:成熺, 송간:宋侃, 이축:李蓄, 정지산:鄭之産)과 승명선(僧明禪)과 승월잠운파(僧月岑雲波)이였다. 이때 초혼사(招魂辭)는 김시습(金時習)이 지었으며 헌작(獻爵)은 金時習이하고 고유(告由)는 조상치(曺尙治)가 하였다. 상왕(上王)의 상복(喪服)을 입은 신하(臣下)는 엄흥도(嚴興道) 권절(權節)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정지산(鄭之産) 조려(趙旅) 이동인(李童仁) 송간(宋侃) 정보(鄭保)이였다.

1698年(肅宗24)에 端宗의 왕위(王位)가 복위(復位)되자 1703年(肅宗29)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追贈)하고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여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하였다, 1781年(正祖5)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정절(貞節)의 시호(諡號)도 내렸다. 이 사당(祠堂)을 1713年(肅宗39癸巳)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 함안 서산서원(咸安 西山書院)과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한다.

서산서원(西山書院)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537-2(慶尙南道 咸安郡 郡北面 院北里)에 소재(所在)하며 1703年(肅宗29)창건(創建)되었다, 1713年(肅宗39)사액(賜額)되었으며 1871年(高宗8)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어 1980-1984年 중건(重建)하였다. 조려(趙旅)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을 음력(陰曆) 9月9日에 봉향(奉享)한다 (漁溪集)

3) 정간공 원호(貞簡公 元昊)

1396年(太祖5)-1463年(世祖9) 조선 단종(朝鮮 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자허(子虛), 號는 관란(觀瀾,) 무항(霧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본관(本貫)은 원주(原州), 별장 헌(別將 憲)의 아들, 1423年(世宗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 여러 벼슬을 역임(歷任)하고 문종(文宗)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가 端宗이 영월(寧越)에 쫓겨 가자 世上과 접촉(接觸)을 끊고 방속에 묻혀 살았다. 寧越 西쪽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端宗 능(陵)이 집의 東쪽에 있어 기거(起居)를 東을 向했다. 1456年(世祖2丙子) 6月 28日 端宗이 청령포(淸泠浦)로 유배(流配)되자 조려(趙旅), 이수형(李秀亨)과 치악산(雉岳山) 무릉리(武陵里) 入口에 제명록(題名錄)을 세우고 단종(端宗)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祈願)했다.

1457年(世祖3) 端宗이 죽은 後 원주(原州)에 내려가 있는 것을 世祖가 特히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주겠다고 불렀으나 이를 거절(拒絶)하였다, 조카인 판서 효연(判書 孝然)이 門밖에서 보기를 請했으나 끝내 거절(拒絶)하였다. 孫子인 숙강(叔康)이 사관(士官)이 되어 직필(直筆)로 화(禍)를 當하자 自己의 저술(著述)과 소장(疏章)을 전부(全部) 불태우고 아들에게 글을 읽어 世上의 명리(名利)를 구(求)하지 말라고 경계(警戒)를 하였다. 저서(著書)를 불태워 기록(記錄)이 남아있지 않다. 1699年(肅宗25) 판부사 최석정(判府事崔錫鼎)의 건의(建議)로 그 절개(節槪)를 찬양(讚揚)하여 고향(故鄕)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784年(正祖8)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정간(貞簡)의 시호(諡號)도 내렸다. 원주(原州)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하며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 함안 서산서원(咸安 西山書院)과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한다.

칠봉서원(七峰書院)은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신현리에 있으며 1612年(광해군光海君4)창건(創建)되었고, 1673年(顯宗14)사액(賜額)되었으며, 1868年(高宗5)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유허비(遺墟碑)만 남아있고 원천석(元天錫), 원호(元昊) 정종영(鄭宗榮), 한백겸(韓百謙)을 배향(配享)하였으나 지금은 불향(不享)한다.

4) 淸簡公 金時習

1435年(世宗17)-1493年(成宗24) 조선 초기 생육신(朝鮮初期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열경(悅卿), 호(號)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본관(本貫)은 강릉(江陵), 시호(諡號)는 청간(淸簡), 고려(高麗)의 시중 태현(侍中 台鉉)의 후손(後孫), 일성(日省)의 아들, 5歲 때 이미 중용대학(中庸大學)에 通하여 신동(神童)이란 이름을 들었고 집현전(集賢殿) 학사 최치운(學士 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감탄(感歎)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1455年 21歲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端宗을 쫓아내고 王位에 올랐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나서 3日이나 통곡(痛哭)하였으며 世上을 비관(悲觀)하여 책(冊)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설잠(雪岑)이라 호(號)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동봉(東峯), 췌세옹(贅世翁) 이라고도 하였다.

세조삼년정축(世祖三年丁丑1457) 十月 二十四日 노산군(魯山君)이 배소(配所)인 영월(寧越)에서 사사(賜死)되자 게룡산 동학사(鷄龍山東鶴寺)의 육신단상(六臣壇上)에 품자형(“品”字形)으로 일단(一壇)을 만들어 통곡제지(痛哭祭之)하였다 초혼칠신(招魂七臣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려趙旅, 성희成熺, 송간宋侃, 이축李蓄, 정지산鄭之産)과 승명선(僧明禪)과 승월잠운파(僧月岑雲波)이였다. 이때 초혼사(招魂辭)는 김시습(金時習)이 지었고. 헌작(獻爵)은 金時習이하고 고유(告由)는 조상치(曺尙治)가 하였다. 상왕(上王)의 상복(喪服)을 입은 신하(臣下)는 엄흥도(嚴興道) 권절(權節)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정지산(鄭之産) 조려(趙旅) 이동인(李童仁) 송간(宋侃) 정보(鄭保)이였다.

양주(楊洲)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等地)를 두루 방랑(放浪)하면서 글을 지어 世上의 허무(虛無)함을 읊었다, 성종(成宗) 때 머리를 길러 47歲에 안씨(安氏)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儒學者)를 만났을 때는 불도(佛道)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世祖) 때에 변절(變節)하여 육신(六臣)을 고(告)한 영의정 정창손(領議政鄭昌孫)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世上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기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4名만은 시종(始終) 변(變)하지 않았다,

상처(喪妻)한 後 재취(再娶)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遺言)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年 後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宣祖)는 이율곡(李栗谷)을 시켜 김시습(金時習)의 전기(傳記)를 쓰게 하였고, 숙종(肅宗) 때에는 해동(海東)의 백이(伯夷)라 하였으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추증(追贈), 1784年(正祖8)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청간(淸簡)의 시호(諡號)도 내렸다.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영월 육신사(寧越 六臣祠)(창절사:彰節祠,로 後에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改稱)에 배향(配享)되었다.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 함안 서산서원(咸安 西山書院)과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한다.

창절서원(彰節書院)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으며 1685年(肅宗11)장릉동에 육신사(六臣祠)로 창건(創建)되었다, 1699年(肅宗25)사액(賜額)되었으며 1705年(肅宗31)현 위치(現位置)로 이건(移建)하고 창절사(彰節祠)로 개칭(改稱)하였다, 1788年(正祖12)서원(書院)으로 승격(昇格)되고 서원철폐령(書院 撤廢令) 때 존속(存續)하였으며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류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박심문(朴審問), 엄흥도(嚴興道) 등을 二月中丁日과 八月中丁日에 봉향(奉享)한다.江原道文化財第27號 (金鰲新話, 梅月堂集)

5) 靖肅公 成聃壽

생졸년월일(生卒年月日)은 불상(不詳)이며 조선세조(朝鮮 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이수(耳叟) 號는 문두(文斗),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門)의 재종제(再從弟)이다, 교리(校理)로 있던 아버지 희(熺)가 단종복위 음모사건(端宗復位陰謀事件)에 연좌(連坐)되어 심(甚)한 고문(拷問) 끝에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3年만에 돌아온 後 공주(公州)에서 울화병(鬱火病)으로 죽으매 이를 본 담수(聃壽)는 1450年(世宗32)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으나 벼슬을 단념(斷念)하고 파주 문두리(坡州 文斗里)에서 아버지의 장례(葬禮)를 지낸 後 文斗라 호(號)하고 서울에 발을 끊고 10餘名의 형제자매(兄弟姉妹)와 함께 그 곳에서 파묻혀 살았다,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戶曹判書 李堅基)의 딸이다.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여 출사(出仕)를 종용(慫慂)했으나 끝내 응(應)하지 않았다. 조카 몽정(夢井)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가 되어 담수(聃壽)를 겨우 찾았을 때는 어찌나 가난한지 방안에 자리도 없었다. 몽정(夢井)이 돌아가서 깔 자리를 보내니 가난하고 천(賤)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굳이 사양(辭讓)하고 받지 않았다, 낚시질로 소일(消日)했었다. 1784年(正祖8)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정숙(靖肅)의 시호(諡號)도 내렸다. 창녕 물계서원(昌寧 勿溪書院)에 성삼문(成三問), 성혼(成渾) 等 一家들과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 함안 서산서원(咸安 西山書院)과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한다.

물계서원(勿溪書院)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79에 있으며 1712年(肅宗38년)창효사(彰孝祠)로 창건(創建)하고 같은 해에 물계사(勿溪祠)로 개칭(改稱)하였다. 1729年(英祖5)서원(書院)으로 승격(昇格)되고 1868年(高宗5)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으며 성송국(成松國) 성여신(成汝信) 성준득(成準得) 성사재(成思齋) 성승(成勝) 성희(成熺) 성삼문(成三問) 성담수(成聃壽) 성수침(成守琛) 성혼(成渾) 성제원(成悌元) 성수경(成守慶) 성문준(成文濬) 성람(成灠)을 배향(配享)한다.(勿溪書院所藏冊版慶南文化財第266號1990.1.16)

6) 文貞公 南孝溫

1454(端宗2)-1492(成宗23) 조선세조(朝鮮世祖) 때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字는 백공(伯恭), 號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생원(生員) 전(恮)의 아들, 의령부원군 남재(宜寧府院君南在)의 오대손(五代孫),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신(曺伸), 이윤종(李允宗), 주계정(朱溪正), 안응세(安應世) 等과 사귀고 어려서 사육신(死六臣)의 충성(忠誠)을 보고 1481年(成宗12) 28歲에 관리등용제도개선(官吏登用制度改善), 내수사(內需司)의 혁파(革罷), 불교(佛敎)의 배척(排斥) 等 국정(國政) 및 궁중(宮中)의 여러 문제(問題)를 지적(指摘)하고 문종(文宗)의 왕후 권씨(王后 權氏)(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陵)인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할 것을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올려 일반(一般)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릉복위 주장(昭陵復位主張)은 세조즉위(世祖卽位)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명분(名分)을 간접적(間接的)으로 비판(批判)했던 것이었으므로 훈구파(勳舊派)의 심(甚)한 반발(反撥)을 샀고 도승지 임사홍(都承旨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領議政鄭昌孫) 等은 그의 국문(鞠問)을 주장(主張)햇다, 1480年(성종:成宗11) 어머니의 당부로 생원시(生員試)에 응시(應試)하여 합격(合格)하였으나 스스로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各地)를 유랑(流浪)하다가 병사(病死)하였다, 사육신(死六臣)의 절의(節義)를 추모(追慕)하고 충절(忠節)이 世上에 傳해지기를 爲해 육신전(六臣傳)을 저술(著述)했다, 연산군(燕山君)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효온(孝溫)이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로 소릉(昭陵)의 복위(復位)를 상소(上疏)한 일이 있다하여 이미 죽은 그의 관(棺)을 꺼내어 참시형(斬屍刑)을 하였고 아들 세충(世忠)도 따라 사형(死刑)을 받았다,

그 後 2年 만에 중종(中宗)이 위(位)에 오르자 이 사실(事實)을 듣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하였고 숙종(肅宗) 때 이르러 함안 백이산(咸安 伯夷山) 밑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을 세워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및 남효온(南孝溫)을 함께 배향(配享)하니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1784年(正祖8)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문정(文貞)의 시호(諡號)도 내렸다.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과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한다.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영월 육신사(寧越 六臣祠)(창절사:彰節祠로 後에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改稱)에 배향(配享)되었다

의양서원(宜陽書院)은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판곡에 있으며 1861年(哲宗12)창건(創建)되었으며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1924年 재건(再建)하여 남효온(南孝溫) 남진(南振) 남용익(南龍翼) 남창희(南昌熙) 등을 배향(配享)하였다.(秋江集, 秋江冷話, 師友明行錄, 鬼神論, 六臣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