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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趙氏十三忠(함안조씨십삼충)

順位 代數 生/卒
(享壽)
漁溪 先生의 職位,贈職 業績
1 壽千
수천
14 1482/1553 (72) 節度使公派祖 武科及第,府使
慶尙水軍節度使
中宗反正에殊勳
靖國原從1等勳
2
16 1534/1598 (65) 虞侯公派 玄孫 武科及第訓練
副正贈兵曹參判
丁酉再亂
蔚山 殉節
3
16 1552/1612 (61) 韜巖公派祖 玄孫 武科及第贈兵曹
宣武原從二等勳
參判忠孝心至極
丁酉再亂
火旺山城 討賊
4
16 1557/1638 (82) 斗巖公派祖 玄孫 忠孝心至極
贈戶曹參判
壬辰倭亂
火旺山城 討賊
5 宗道
종도
17 1537/1597 (61) 大笑軒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咸陽郡守
贈吏曹判書諡忠毅
夫婦雙節閣
丁酉再亂
黃石山城 殉節
6 俊男
준남
17 1547/1597 (51) 承旨公派祖 五代孫 昭格署參奉贈
左承旨孝心至極
父子雙節閣
丁酉再亂時曾祖墓
發掘에 憤慨,倭賊을
매궐하고 殉節
7 信道
신도
17 1554/1595 (42) 判書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溫陽郡守
贈兵曹判書扈聖原
從一等勳宣武原從三等勳
壬辰倭亂,漢江戰
鬪殉節,宣祖義州
避亂扈衛
8 敏道
민도
17 1556/1592 (37) 監察公派祖 五代孫 贈司憲府監察
忠孝心至極
壬辰倭亂
尙州戰鬪殉節
9 凝道
응도
17 1565/1597 (33) 固城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
固城縣令
贈兵曹參議
壬辰倭亂7年間陸
海서奮戰,丁酉
再亂固城戰鬪殉節
10 亨道
형도
17 1567/1637 (71) 東溪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河陽
縣監,慶山縣令
贈嘉善大夫副元帥
李适亂國王扈駕,
火旺山城 倭討賊
11 益道
익도
17 1575/1647 (73) 參議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宣傳官
贈兵曹參議
仁祖反正殊勳,李
适亂에 忠誠討賊
12 善道
선도
17 1580/1640 (61) 禦侮公派祖 五代孫 武科及第禦侮將軍
振武原從一等勳
李适亂殊勳
爲國忠誠
13 繼先
계선
18 1570/1627 (58) 承旨公派 六代孫 武科及第宣傳官
贈兵曹參判
仁祖反正殊勳
丁卯胡亂義州殉節


咸安趙氏十三忠錄(함안조씨십삼충록)

◉명문가(名門家)의 요건
우리 함안조씨(咸安趙氏)가 천년동안 대대로 지켜온 가훈(家訓)은 “충효(忠孝)에 뛰어나며 참됨을 지키고 명분에 편안하며 지극히 공정하고자 하여 더욱 독실(篤實)하게 한다“[長長於忠孝守愼安分 至公而尤篤] [素仰先生語錄]

조선시대 명문가(名門家)의 요건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퇴계(退溪), 남명(南冥)과 같은 걸출(傑出)한 학자를 배출(輩出)하거나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이바지 하거나 아니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우리 함안조씨를 살펴보면 퇴계선생(退溪先生)이나 율곡선생(栗谷先生), 그리고 남명선생(南冥先生)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집안도 아니고 대과 급제자도 33명에 불과하여 공경대부(公卿大夫)에 오른 사람이 드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함안조씨는 말석(末席)에 앉아도 양반(兩班)”이라고 불릴 만큼 명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바로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기록된 전서공(典書公), 고죽재공(孤竹齋公), 덕곡공(德谷公)과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인 정절공(貞節公)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보여주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결(高潔)한 지절(志節)과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국란(國亂)에 살신순국(殺身殉國)하신 선조들의 충의정신(忠義精神)이 면면(綿綿)이 이어온 충절(忠節)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능력만 된다면 대학자(大學者)가 될 수 있고 대과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갈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충절은 면면이 이어지는 가풍(家風)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함안조씨십충록(咸安趙氏十忠錄)
함안조씨십충(咸安趙氏十忠)이란 정절공(貞節公) 어계선생(漁溪先生)의 후손 가운데 선조(宣祖)때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하자 의(義)로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살신순국(殺身殉國), 토적(討賊)하신 참판공(參判公) 휘(諱) 붕(鵬), 두암공(斗巖公) 휘(諱) 방(垹), 충의공(忠毅公) 휘(諱) 종도(宗道), 판서공(判書公) 휘(諱) 신도(信道), 감찰공(監察公) 휘(諱) 민도(敏道), 참의공(參議公) 휘(諱) 응도(應道)의 여섯 분의 선조(先祖)와 인조(仁祖)때 이괄(李适)의 난(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하자 참판공(參判公) 휘(諱) 계선(繼先)이 선등격적(先登擊賊)하여 훈공(勳功)을 세우거나 실진력갈(失盡力喝)하여 순국(殉國)하신 (參議公) 휘(諱) 익도(益道), 어모공(禦侮公) 휘(諱) 선도(善道), 정유재란(丁酉再亂)시 왜적의 집의공(執義公) 묘소발굴(墓所發掘)을 저지(沮止)하다가 자문(自刎)하신 승지공(承旨公) 휘(諱) 준남(俊男) 등 열 분의 선조(先祖)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正祖8年1784年 十忠錄要約]

십충실록(十忠實錄)의 서문(序文)은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제공(蔡濟公:1720-1790년)이 찬술(撰述)했다.

◉함안조씨십삼충록(咸安趙氏十三忠錄)
위의 열분 선조(先祖) 외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參與)하여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에 녹(錄)해진 절도사공(節度使公) 諱 수천(壽千)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도암공(韜巖公) 諱 탄(坦),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70이 넘은 노령(老齡)으로 단신(單身) 근왕(勤王)하다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恥辱)을 듣고 울분(鬱憤)이 폭발(爆發), 등창(등瘡)이 터져 분사(憤死)하신 동계공(東溪公) 諱 형도(亨道) 세분의 선조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正祖18年1794年 十三忠實錄要 約]


1. 절도사공 조수천(節度使公 趙壽千)(漁溪先生孫子)은

절도사공파조(節度使公派祖)로 성종임진년(成宗壬辰)(1472)에 출생하여 연산군 계해년(燕山君癸亥)(1503)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였는데 천성(天性)이 강직엄정(剛直嚴正)하고 용모(容貌)가 아름다웠으며 체구(體軀)가 장대(壯大)하여 무척 용맹(勇猛)스러웠다.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반정거사(反正擧事)에 참여(參與)하여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중종(中宗)이 가상(嘉尙)히 여겨 정국원종일등(靖國原從一等)에 녹권(錄券)하게 하면서 “충절(忠節)로써 나라를 바로 잡는 것은 신하(臣下)의 직분(職分)이고 공을 기록(記錄)하고 포상(褒賞)하는 것은 왕자(王者)의 도리(道理)이다 국운(國運)이 중도(中途)에 기울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태(危殆)롭게 되었는데 다행히 동덕(同德)한 신하들이 협찬(協贊) 추대(推戴)하였으니 원종(原從)의 공이 있다 내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기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고(考)를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증직(贈職)하고 특별히 충청병마사(忠淸兵馬使)에 제수(除授)하였다가 다시 경상도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에 제수(除授)하였다.


2. 참판공 조붕(參判公 趙鵬)(漁溪先生玄孫)은

중종갑오년(中宗甲午:1534)에 출생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이었는데 선조(宣祖) 임진(壬辰)년에 왕을 호종(扈從)하여 왜적(倭賊)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으나 단신 적진(敵陣)으로 돌진(突進)하여 싸우다가 포로(捕虜)가 되었다.

공은 적들의 항복권유(降伏勸誘)에도 불구하고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내가 예의(禮儀)의 나라에 태어나서 어찌 네놈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겠는가.”하니 적들이 公의 입을 도끼로 찍었으나 끝내 적들을 매도(罵倒)하다가 목숨을 거두었다.

조정(朝廷)에서는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였다가 뒤에 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贈職)하고 훈권(勳券)에 기록하였다.


3. 참판공 조탄(參判公 趙坦)(漁溪先生玄孫)은

도암공파조(韜巖公派祖)로 명종임자(明宗壬子:1552)에 출생하여 선조계묘(宣祖癸卯)년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공이 청송(靑松)에 있었는데 꿈에 선고(先考) 참판공(參判公)이 나타나 “적들이 나의 집(무덤)을 해치는데 너는 모르느냐” 하므로 놀라 일어나 급히 여러 형제에게 전하고 삼백리 길을 달려 옹곡산소(甕谷山所)에 이르러 보니 왜적들이 묘소를 파서 관(棺)이 드러나 있었다.

공은 선고(先考)의 관(棺)을 안고 통곡(痛哭)하였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므로 왜적들도 효성(孝誠)에 감동하여 아무 해(害)도하지 않았다. 공은 관을 메고 헤엄쳐 강을 건너 仁州까지 가서 천생산성(天生山城) 아래 안장(安葬)하였다.

공은 국가의 위급함과 선친 묘(先親墓)의 망극(罔極)한 변(變)을 당한 원수(怨讐)를 갚기 위해 조카 형도(亨道)와 함께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을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가서 왜적을 무찌르고 망우당(忘憂堂)이 부친상(父親喪)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의병들을 지휘(指揮)하기도 하였다. 명(明)나라 도독(都督)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서 고전(苦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 일천을 거느리고 가서 명군(明軍)과 합세(合勢)하여 울산성(蔚山城)을 지켰다.

전후(戰後)에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겸 절충조방장군(折衝助防將軍)의 녹권전지(錄券傳旨)를 받았다. 조정의 분당(分黨)으로 벼슬할 생각이 없어 세상과 인연(因緣)을 끊고 지내다가 광해군(光海君) 임자(壬子)년(1612)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61세이었다.

인조(仁祖) 5년(1627)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은 시로서 “유의방가(留意邦家) 경신부적(輕身赴敵)”(국가를 위해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적을 무찔렸다)했다고 칭송(稱頌)하였다.


4. 참판공 조방(參判公 趙垹)(漁溪先生玄孫)은

두암공파조(斗巖公派祖)로 명종정사(明宗丁巳:1557)에 함안 검암리(儉巖里)에서 출생하여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인(門人)인 황곡(篁谷) 이칭(李偁)선생에게 배워 일찍부터 도학(道學)의 진리(眞理)를 깨닫고는 퇴계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보고 즐거워하며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하였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칠원(漆原) 무릉(武陵)에 있었는데 각읍(各邑) 수령(首領)들이 성(城)을 버리고 도망(逃亡)치는 것 을 보고는 “국록(國祿)을 먹는 자들이 어찌 이럴 수 가 있는가”하고 집안의 젊은 장정(壯丁) 백여명을 이끌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의 진영(陣營)으로 달려갔다.

가형(家兄) 판관(判官)공 탄(坦)과 조카 형도(亨道)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기세(氣勢)를 올리니 적들이 물러가므로 추격(追擊)하여 많은 적들의 목을 베었다. 공은 지략(智略)을 겸비(兼備)하여 무적장군(無敵將軍)이란 칭호(稱號)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고향에 숨어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 충절(忠節)과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하여 장계(狀啓)를 올려 표창(表彰)을 받게 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놀라 맏아들을 보내어 그 문서를 빼앗아 불사르게 하며 “신하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이다 무엇 때문에 표창할 것인가 내가 죽은 후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일체금지(一切禁止)하고 지하(地下)에서 수치(羞恥)를 끼치지 말라”하였다. 선생이 시(詩)를 지어 벽(壁)에 걸어 두었는데

事親當盡孝 (사친당진효) (어버이 섬김에는 당연히 효도이고)
爲國亦當忠 (위국역당충) (나라를 위함에는 충성이 마땅한데)
嗟我俱無及 (차아구무급) (슬프다 이 내 몸은 두 가지다 못했으니)
江湖恨不窮 (강호한불궁) (세상에 한스러움 다함이 없네 그려)
라고 하였다

망우당(忘憂堂) 郭선생이 이 시를 보고 더욱 칭송(稱頌)하였다. 인조무인(仁祖戊寅)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2세이었다. 저서(著書)로 충효실감(忠孝實鑑) 가훈팔잠(家訓八箴)이 있으며 증직(贈職)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이다.


5. 충의공 조종도(忠毅公 趙宗道)(漁溪先生五世孫)는

대소헌공파조(大笑軒公派祖)로 중종정유(中宗丁酉:1537)에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였으며 9세에 정두(鄭斗)선생에게 배워 15세에 진주 향시(晋州鄕試)에 합격하고 명종무오(明宗戊午)년(1588)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선조(宣祖)6년 계유(癸酉:1573)에 성균관(成均館)의 추천(推薦)으로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배명(拜命)하였고 선조(宣祖) 정축(丁丑)(1577) 40세에 선위사(宣慰使)를 따라 일본(日本) 사신(使臣) 현소(玄蘇)를 회견(會見)했는데 오만(傲慢)한 현소(玄蘇)를 시를 지어 꾸짖으니 현소(玄蘇)가 놀라 재배(再拜)하고 그 시를 읽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25년 임진(壬辰:1592) 56세 때 왜란(倭亂)이 일어났는데 급히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이노공(李魯公)을 만나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약속(約束)하고 함양(咸陽)에 도착 초유사(招諭使)인 학봉(鶴峰)선생을 만나 의령가수(宜寧假守)로 임명(任命)을 받아 의령(宜寧)에 부임(赴任)하였다가 모든 직책(職責)을 곽망우당(郭忘憂堂)에게 넘겨주고 이노공(李魯公)과 함께 초유사(招諭使)인 학봉(鶴峰)선생을 만나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술을 마시며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서(盟誓)하였다.

선조(宣祖)29년(1596) 60세 때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고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안음현감(安蔭縣監) 곽준공(郭逡公)과 함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인솔(引率)한 왜적(倭賊)들과 분전(奮戰)하다가 순국(殉國)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의 증직(贈職)이 내렸고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6. 판서공 조신도(判書公 趙信道)(漁溪先生五世孫)는

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로 명종(明宗)9년 갑인(甲寅:1554)에 태어났다.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고 지혜(知慧)가 탁월(卓越)하여 16세에 시를 지었는데 “활을 방어산(防禦山) 고개에 에 걸고 강(江)나루를 달려라 임안사(臨安史)를 읽었더니 충신(忠臣)이 한두 사람뿐이더라“ 라고 하여 앞으로 나라 위한 충신이 되려는 포부(抱負)를 나타내었으며 동한마원(東漢馬援)의 전기(傳記)인 복파전(伏波傳)을 읽고 ”말가죽으로 시체(屍體)를 싸서 돌아오는 것이 참다운 대장부(大丈夫)다“라고 하여 문관(文官)으로 출세(出世)하기보다는 무관(武官)으로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래서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온양군수(溫陽郡守)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대가(大駕)를 호위(護衛)하였는데 왜적들이 길을 막아 빠져 나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先生은 王에게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호위병(護衛兵) 300명을 주시면 목숨을 걸고 막아 내겠습니다”하니까 왕이 군사 300명을 허락해 주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敵陣)으로 쳐들어가 적의 목을 베고 깃대를 꺾으면서 싸우니 적들이 도망(逃亡)을 쳤다. 그 틈을 타서 왕은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 의주(義州)까지 피란(避亂)하였다.

그 뒤 선조(宣祖)28년 을미(乙未:1595) 한강전투(漢江戰鬪)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져 백병전(白兵戰)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전사(戰死)하였다. 선조(宣祖)가 부음(訃音)을 듣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위기(危機)를 벗어난 것은 장군의 힘이다. 한(漢)나라 기신(紀信)이라고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특별히 그해(乙未)에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호성일등훈(扈聖一等勳)의 녹권선무훈(錄券宣武勳)을 내렸다.


7. 감찰공 조민도(監察公 趙敏道)(漁溪先生五世孫)는

감찰공파조(監察公派祖)로 명종(明宗) 11년 병진(丙辰:1556)에 출생하였는데 종형(從兄) 대소헌선생(大笑軒)과 가형(家兄) 판서공(判書신도:信道) 세 사람이 의기(意氣)가 상통(相通)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나라의 위기(危機)를 구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부인(夫人)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가 짓밟혀져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적을 무찔러 싸우려 나가니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살아오지는 못할 것이오”하면서 머리카락을 잘라서 부인에게 주고 “내가 죽거든 이 머리카락으로 선영하(先塋下)에 장사(葬事)지내시오”하였다.

부인과 단장(斷腸)의 슬픔으로 이별(離別)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그의 부하(部下)로서 참전(參戰)하였다. 상주(尙州)전투에서 10만이 넘는 왜병(倭兵)과 싸웠는데 당하지 못하자 군사들이 도망하기 시작하였으나 先生은 “국가가 위험(危險)한 지경(地境)에 이르러서 그 난(亂)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선조(宣祖) 임진(壬辰)년 4월 25일 전사(戰死)하니 향년(享年) 37세이었다. 나라에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특증(特贈)하고 녹훈정려(錄勳旌閭)와 함께 조세감면(租稅減免)의 은전(恩典)이 내렸다.


8. 승지공 조준남(承旨公 趙俊男)(漁溪先生五世孫)은

승지공파조(承旨公派祖)로 명종(明宗)2년 정미(丁未:1547)에 출생하였는데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돼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적들이 밀어닥치는 데도 파란(避亂)하지 않으며 “내가 평소(平素)에 글을 읽어 임금에게 충성(忠誠)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도리(道理)를 알고 있는데 비록 책임(責任)을 진 관리(官吏)들은 달아나고 없지만 어찌 내 몸과 처지만 보전(保全)하는 무리들과 같이 달아나 피(避)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선조(宣祖)30년 정유(丁酉:1597)에 왜적들이 증조(曾祖) 집의공(執義公) 묘(墓)를 발굴(發掘)하자 공이 적중(敵中)을 뚫고 들어가서 흙을 지고 와 관(棺)을 덮으니 적들이 왜군(倭軍) 진중(陣中)으로 가자고 위협(威脅)하자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모욕(侮辱)하고 선조(先祖)의 묘소(墓所)를 무단(無斷) 발굴하였으니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怨讐)이다. 어찌 너희들의 뒤를 따라가 구차하게 살겠는가”하며 무진정(無盡亭)에서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니 적들이 이 광경(光景)을 보고 “의(義)로운 사람이다”하면서 의복(衣服)으로 시체(屍體)를 덮어주고 달아났다.

그래서 후세(後世) 사람들이 무진정(無盡亭) 밑의 죽순(竹筍)과 나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高宗)5년 무진(戊辰)(1868)에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9. 고성공 조응도(固城公 趙凝道)(漁溪先生五世孫)는

고성공파조(固城公派祖)로 명종(明宗)20년 을축(乙丑:1565)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간담(肝膽)이 크고 용기(勇氣)가 있었다한다. 선조(宣祖)16년 계유(癸酉:1583) 19세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학문(學文)과 무술(武術)이 뛰어났음을 보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선생은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서 소수(小數)의 부하(部下)를 이끌고 성(城)을 사수(死守)하기로 결심(決心)하고 화살이 다할 때까지 역전분투(力戰奮鬪)하였으나 수많은 왜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왜적을 꾸짖으며 단도(短刀)로 자결(自決)하였다. 나라에서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10. 군수공 조형도(郡守公 趙亨道)(漁溪先生五世孫)는

동계공파조(東溪公派祖)로 명종(明宗)22년 정묘(丁卯:1567)에 청송(靑松) 안덕(安德)에서 출생하였다. 21세에 함안으로 귀성(歸省)하다가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베푸는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27세로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망우당(忘憂堂) 곽장군(郭將軍)을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힘을 다해 싸웠다.

선조(宣祖)27년(1594) 조정에서는 무과시(武科試)를 베풀어 인재(人材)를 뽑았는데 28세인 선생은 “남아(男兒)가 이 어려운 세상에 나서 국난(國難)의 수습(收拾)이 시급(時急)한데 어찌 신하된 자의 도리(道理)로 문과(文科)만 바라리오”하면서 곧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응시(應試)하여 선전관(宣傳官) 및 비국랑(備局郞)을 배수(拜受)하였다.

이 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영의정(領議政)으로서 국왕(國王)에게 보고할 일체 문서작성(文書作成)을 선생에게 일임(一任)했는데 응호서필(應呼書筆)이 빨라서 나는 것 같으나 한 자(字)도 그릇됨이 없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모두 칭송(稱頌)하고 조정(朝廷)에서 상(賞)으로 통정계(通政階)를 제수(除授)하였다.

그 후 하양(河陽), 경산(慶山), 고성(固城) 등의 현감(縣監), 현령(縣令)을 지내고 가선계(嘉善階)에 올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부원수(副元帥) 보성군수(寶城郡守) 등에 배명(拜命)되었다. 이괄(李适)의 난(亂)에 호가(扈駕)하여 적당(敵黨)을 격멸(擊滅)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70세로 분노(憤怒)를 참지 못하여 출전(出戰)하려 하였으나 화해(和解)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鬱憤)이 촉발(觸發)하여 등창(등瘡)이 터져 얼마 후에 졸(卒)하였다.


11. 참의공 조익도(參議公 趙益道)(漁溪先生五世孫)는

참의공파조(參議公派祖)로 선조(宣祖)8년 을해(乙亥:1575)에 출생, 인조(仁祖)25년 정해(丁亥)(1647)에 졸(卒)하였는데 천성(天性)이 근엄중후(謹嚴重厚)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무예(武藝)를 닦아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벼슬이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인조(仁祖)2년 갑자(甲子:1624)에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오늘 내가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타고 다니던 말가죽에 내 시체(屍體)를 싸서 고향(故鄕)에 보내라”하고 공주(公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맹서(盟誓)하고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진(陣)에 나아가 이괄(李适)을 섬멸(殲滅)하였다.

인조(仁祖)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난리(亂離)를 당하여 한 번 죽는 일이 어렵고 거취(去就)를 분명히 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손가락을 끊어서 혈서(血書)를 쓰는 충정(衷情)은 열배(涅背)의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여 악왕정충록(岳王貞忠錄)을 특사(特賜)하고 녹훈권(錄勳券)을 하사(下賜)하였다. 영조(英祖) 기축(己丑)년(1769)에 병조참의(兵曹參議)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12. 어모공 조선도(禦侮公 趙善道)(漁溪先生五世孫)는

어모공파조(禦侮公派祖)로 선조(宣祖) 13년 경진(庚辰:1580)에 출생하였는데 선조(宣祖)27년 갑오(甲午:1594) 15세에 모부인(母夫人)이 빚어준 술 한 두루미를 들고 명군(明軍)을 맞아 접대(接待)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무오(戊午:1618)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부장(部將)이 되었고 인조(仁祖)2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亂)에 절도사(節度使)의 막료(幕僚)로서 안현(鞍峴)(=무학재)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진무원종일등(振武原從一等)에 녹훈(錄勳)되었다.


13. 참판공 조계선(參判公 趙繼先)(漁溪先生六世孫)은

인조(仁祖)5년 정묘(丁卯:1627) 호란(胡亂)때에 청병(淸兵)이 졸지(猝地)에 밀어닥치자 선봉(先鋒)에 나가서 적을 무수히 무찌르고 전사하였다. 숙종(肅宗)32년 병술(丙戌:1706)에 부자정려(父子旌閭)를 명(命)하면서 “부자쌍절(父子雙絶)”이라 하여 무진정(無盡亭) 왼쪽 백보지점(百步地點)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김시황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동양예학 회장

(金時晃 慶北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東洋禮學 會長)

咸安趙氏 十三忠錄 原文
忠者人臣之大節聖人謂之成仁一國而得一人難矣況一家乎一家而得一人難矣況十餘人乎余於咸安之趙不覺悚然而驚咨嗟而永歎也 謹按其家傳漁溪先生旅以太學生當莊陵內禪揖諸生歸隱于洛東江上伯夷山下終身不服出時人此之金悅卿庶乎求仁而得仁者也 其後子孫世篤忠義 ①三世孫曰壽千以宣傳官當中廟反正之日首參靖國樹魁勳特除兵馬使錄原從一等 ②四世孫曰鵬以訓練僉正當壬辰之亂奮義討賊矢盡力竭罵賊而死 ③曰坦壬辰之亂賊掘父墓負柩游江水權葬誓復讎從紅衣將軍郭再祐守火旺山城斬獲甚多體察使李公元翼聞于朝除訓練判官賜原從勳 ④其弟垹與兄同守山城力戰却敵 ⑤五世孫曰宗道丁酉亂爲咸陽郡守旣遞不去率邑子弟固守城陷與妻同死 ⑥曰信道壬辰以溫陽郡守扈從覘賊遇賊戰死 ⑦曰敏道壬辰從巡邊使李鎰戰死於尙州 ⑧曰俊男丁酉賊發其祖墓冒白刃入賊中掘土掩屍賊脅降之不屈拔所佩刀刎自死 ⑨曰應道丁酉爲固城縣令賊猝至力戰死 ⑩曰益道甲子在逆适摹下适忌之出使于外在途聞适擧兵馳詣行在上命迭張元帥陳先登擊賊适敗錄勳 ⑪曰善道甲午年甫十五聞天兵南下請于母携一壺酒詣天將陳曰嘗讀書聞簞食壺漿以迎王師敢獻足下天將大奇之曰好箇忠孝兒及甲午亂從節度使赴鞍峴陳策勳 ⑫曰亨道丙子亂年踰七十矣以前郡守獨身勤王至忠州聞和議成北望痛哭俓還故山疽發背死 ⑬六世孫曰繼先丁酉居義州府尹李莞幕下虜夜襲城陷力竭死之漁溪之後凡六世靖國者一人死敵者七人從軍 而却敵者四人勤王病死者一人生死踓異其忠於國一也 鳴呼盛矣古未聞也斯可見國朝培養節義之化偏萃於一門可以書之簡冊永詔 後世余職是太史謹敍官職名字事蹟以備國乘之考.
聖上十八年(1794)
輔國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徑筵事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洪良浩 序(1724-1802).


咸安趙氏 十三忠錄(함안조씨 십삼충록) (原文直譯)
충(忠)은 인신(人臣)의 대절(大節)이다. 성인(聖人)이 이른바 성인(成仁)이라 했는데 일국(一國)에서 한사람을 얻기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일가(一家)에서랴, 또 일가(一家)에서 한 사람을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십인(十人)이서랴 내 함안의 趙씨에 송연(悚然)함을 깨닫지 못하고 놀라 자차(咨嗟) 영탄(永嘆)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하니 그의 가전(家傳)에 어계선생(漁溪先生) 려(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장릉(莊陵:端宗廟號)의 선위(禪位)에 당하여 제괸생(諸館生)과 작별하고 낙동강상(洛東江上) 백이산하(伯夷山下)에 귀은(歸隱)하여 종신(終身)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시인(時人)이 비(比)하여 김열경(金悅卿:金時習의 字)이라 하였으니 서기(庶幾) 인(仁)을 구(求)하여 인(仁)을 얻은 사람이다 그 후 자손(子孫)이 세세(世世)로 충의심(忠義心)이 돈독(敦篤)하여.
①손자(孫子) 수천(壽千)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특제(特除)되었으며 원종일등(原從一等)에 록(錄)하였다.
②현손(玄孫)은 붕(鵬)인데 훈련첨정(訓練僉正)으로서 임진란(壬辰亂)에 당하여 분의(憤義) 토적(討賊)하다가 실진력갈(失盡力竭)하고 매적(罵賊)하면서 전사(戰死)했다.
③탄(坦)은 임진란(壬辰亂)에 적이 부묘(父墓)를 발굴(發掘)하므로 구곽(柩槨)을 지고 강수(江水)를 헤엄처 임시장사(臨時葬事)하고 복수(復讐)를 맹서(盟誓)하면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막하(幕下)에 들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참획(斬獲)이 많았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가(朝家)에 보고하여 훈련판관(訓練判官)에 제수(除授)하였다 원종훈(原從勳)을 내리고.
④그의 제(弟) 방(垹)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력전각적(力戰却賊)하였다.
⑤오세손(五世孫) 종도(宗道)는 정유재란(丁酉再亂)에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있다가 이미 체임(遞任)이 되었는데 떠나지 않고 읍중(邑中) 자제(子弟)와 더불어 성을 고수(固守)하다가 성함(城陷)과 동시에 처(妻)와 같이 사절(死節)했다.
⑥신도(信道)는 임진란(壬辰亂)에 온양군수(溫陽郡守)로 있으면서 왕가(王駕)에 호종(扈從)하여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⑦민도(敏道)는 임진란(壬辰亂)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따라 상주(尙州)에서 전사했다.
⑧준남(俊男)은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적이 조묘(祖墓)를 발굴(發掘)하므로 백인(白刃)을 무릅쓰고 적중(敵中)에 들어가 굴토(掘土)한 시체(屍體)를 가리우자 적이 위협(威脅) 항복(降伏)하라 하므로 패도(佩刀)를 빼어 자문(自刎)하였다.
⑨응도(凝道)는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있으면서 적이 창졸간(倉卒間)에 닥쳐 력전(力戰)타가 전사했다.
⑩익도(益道)는 갑오(甲午)년에 이괄(李适)의 막하(幕下)에 있던 중 괄(适)이 꺼려 외지(外地)에 사명(使命)으로 보내었다. 중도(中途)에서 괄군(适軍) 반란(反亂)의 정보(情報)를 듣고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가니 왕이 장원수(張元帥) 막하(幕下)에 명송(命送)하였다. 선등격적(先登擊賊)하여 이괄군(李适軍)을 무찔렀다(서훈:敍勳)
⑪선도(善道)는 갑오(甲午)년에 겨우 십오세의 나이로 천병(天兵)이 남하(南下)함을 듣고 모부인(母夫人)에 청(請)하여 일호주(一壺酒)를 들고 천장진(天將陣)에 이르러 말하기를 일찍 글 읽어서 단식호장(簞食壺漿)으로 왕사(王師:王軍)를 맞아 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감히 족하(足下)에 드립니다. 하니 천장(天將)이 크게 기특(奇特)하게 여겨 좋은 충효아(忠孝兒)라 하였다. 갑자란(甲子亂)에 절도사(節度使)를 따라 안현(鞍峴)에서 싸워 책훈(策勳)이 되었다.
⑫형도(亨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나이 칠십이 넘어도 전군수(前郡守)로서 독신(獨身) 근왕(勤王)하여 충주(忠州)에 이르자 화의(和議)가 성립(成立)된 것을 듣고 북망통곡(北望痛哭)하다가 등창(등瘡)이 나서 죽었다.
⑬육세손(六世孫) 계선(繼先)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의 막하(幕下)에 있다가 오랑캐의 야습(夜襲)으로 함성(陷城)함에 따라 역갈전사(力竭戰死)하였다.
어계(漁溪)의 후대(後代)에 무릇 육세(六世)에 정국자(靖國者) 一人 전사자(戰死者) 七人 종군(從軍) 각적(却賊)한 자 四人 근왕(勤王) 병사자(病死者) 一人으로 생사(生死)는 비록 다르나 국가에 충효(忠孝)하기는 일반이다.
명호(鳴呼) 성대(盛大)하구나 옛 일에도 듣지 못하였다. 국조(國朝)기 배양(培養)한 절의(節義)의 교화(敎化)가 일 문중(一門中)에 편재(偏在)함을 보니 가히 간책(簡冊)에 쓰고 후세에 길이 전 할만 하도다. 나의 직(職)이 사관(史官)이라 삼가 관직(官職) 명자(名字) 사적(事蹟)을 서술(敍述)하여 써 국사(國史)의 참고자료(參考資料)에 대비(對備)한다.
성상십팔년(정조십팔년1794년)
보국숭록대부원임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홍문관
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홍양호 서.(1724-1802)
聖上十八年(1794) 輔國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徑筵事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洪良浩 序(1724-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