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禧-之興-天啓(2)-悅

1) 행장(行狀)
공(公)의 諱는 열(悅), 호(號)는 금은(琴隱)으로 고려 말(高麗末)에 태어나 관직(官職 )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으나 생년월일(生年月日), 관직(官職), 이력(履歷)은 세대(世代)가 멀어서 고증(考證)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세종(世宗) 1년(1419년), 기해년(己亥年) 겨울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슬하(膝下)에 이(彛), 녕(寧), 환(桓), 안(安)의 사형제(四兄弟)를 두었다. 산원공(散員公) 諱 이(彛)는 산원공파(散員公派)의 파조(派祖)이다. 현감공(縣監公) 諱 녕(寧)의 아들인 참지공(參知公) 諱 욱(昱)은 참지공파(參知公派)의 파조(派祖)이다. 諱 환(桓)은 무후(无后)이다. 시정공(寺正公) 諱 안(安)의 아들인 어계공(漁溪公) 諱 려(旅)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으로 시호(諡號)가 「정절(貞節)」이다.
2) 묘소(墓所) 및 선적(先蹟)
묘소(墓所)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慶尙南道 咸安郡 郡北面 院北里) 건좌(乾坐)-원북재 묘역(院北齋 墓域)이며 전서공(典書公) 諱 열(悅) 이전의 함안조씨 선대(先代) 묘소(墓所)는 모두 실전(失傳)되어 전하지 않는다. 묘향(墓享)은 음력 10월 11일 오전이다.
배정부인곤양전씨설단(配貞夫人昆陽田氏設壇) : 실전(失傳)
후배정부인아산장씨묘(后配貞夫人牙山蔣氏墓) : 묘부후(墓祔後)-원북재 묘역
전서공신도비각(典書公神道碑閣)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서산서원(西山書院) 옆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3) 언행록(言行錄)
공(公)은 처음 함안 평관리(平館里 : 뒤에 평광(平廣)이라 고침)에서 살다가 후(後)에 원북동으로 옮겼다. 공(公)은 거문고(琴) 타기와 그림(畵) 그리기에 능(能)하였다. 매양 달 밝은 밤이면 거문고를 탔는데 그 소리가 수리(數里)에 들렸고 그림 역시 후세(後世)에 전한다.【함주지(咸州誌)】

공양왕(恭讓王) 3년(1391년)에 공(公)이 상소(上疏)하기를 "시중(侍中) 이단(李旦 : 李成桂)의 부자 상모(相貌)가 비범(非凡)하고 지용(智勇)을 겸비(兼備)하여 원주(原州)에 유진(留陣)하면서이름은 토적(討賊)한다하나 뜻은 벌군(伐君)에 있어 밖에서는 그 아비가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고 안에서는 그 아들이 조정(朝廷)을 체결(締結)하니 신(臣)이 듣건대 위세(威勢)가 진군(振君)하면 찬역(簒逆) 하지 않는 자 없사오니 이단(李旦)이 병권(兵權)을 잡으면 용(龍)이 구름을 얻은 것과 같은지라. 탈병(奪兵)하면 백년을 안과(安過)할 것이요, 탈병(奪兵)하지 않으면 위태(危殆)함이 명일(明日)에 달렸으니 속히 그 병권(兵權)을 거두어 사직(社稷)을 편히 하소서 하고 삼일(三日)을 연이어 상소(上疏)하고 10차에 걸쳐 면간(面諫)하여도 왕(王)이 그 부자를 두려워하여 차마 용단(勇斷)하지못하고, 도리어 공(公) 등을 원방(遠方)으로 축출(逐出)하니 공(公)은 함안(咸安)으로 돌아가고 길재(吉再)는 선산(善山)으로 돌아가고 이색은 한산(韓山)으로 돌아갔다.【출고려사(出高麗史)】

공양왕 4년(1392년) 이성계가 원주(原州)에서 스스로 왕(王)이 되고 공양왕을 폐(廢)하여 군(君)으로 봉(封)하고 간성(杆 城)에 유배(流配)하니 나라 안의 민심(民心)이 흉흉(洶洶)하여 물 끓는 듯하였다. 이성계가 송악(松嶽) 수창궁(壽昌宮)에 즉위 (卽位)하고 공신(功臣) 조준(趙浚), 남재(南在), 정도전(鄭道傳), 배극렴(裵克廉) 등 39인을 봉(封)하고 왕씨(王氏)인 왕강(王康), 왕상,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 등을 해도(海島)에 옮겼다. 공이 영남(嶺南)에 있어 이성계가 벌군(伐君)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통곡호천(痛哭呼天)하시고 홍재 (洪載), 길재(吉再), 조안경(趙安卿) 조승숙(趙承肅)등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국사회복(國事回復)을 의논(議論)하니 모여 든 사람이 70여명이요, 비빈(妃嬪), 궁녀(宮女)와 종친자녀(宗親子女), 재상처첩(宰相妻妾) 등을 비롯하여 그곳에 피난(避亂)해 온 사람이 수천 명(數千名) 에 이르렀다.

두문동은 궁벽(窮僻)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은 지라 70여명이 가산(家山)을 내어 구제(救濟)하니 차차로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그 중에는 충렬(忠烈)과 도덕(道德)과 문장(文章)과 재지(才智)가 있어 태조(太祖)가 평소에 흠앙(欽仰)하던 사람은 혹은 벼슬로써 부르고, 혹 위엄(威嚴)으로서 협박(脅迫)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공(公)은 맹사성(孟思誠), 조안경(趙安卿), 임선미(林先味) 등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따라 간성(杆城)으로 가셨다. 【출고려사(出高麗史)】

조선 태조 원년(1392년) 폐위(廢位)된 공양왕(恭讓王)을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간성(杆城)을 탕목읍(湯沐邑 )이라 하여 잡인(雜人)을 엄금(嚴禁)하니 공(公)은 이름을 숨긴 채 유산객(遊山客)으로 변장(變裝)하여 민가(民家)에 숨어서 시시(時時)로 공양왕(恭讓王)에게 문후(問候)를 드렸다.【출조선사(出朝鮮史)】

태조 3년(1394년) 한양궁역(漢陽宮役)이 준공(竣工)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각도제군(各道諸郡)에 명(命)하여 금(琴), 소(簫), 가무(歌舞 )에 유명한 사람을 불렸다. 태조는 본래 조전서(趙典書)가 거문고 잘 타는 것을 알고 고인(故人)의 예(禮)로써 손수 편지를쓰고 사인교(四人轎)를 보내어 청(請)하니 공(公)은 예대(禮待)를 사양(辭讓)하기 어려워 추포(麤布)를 입고 망혜(芒鞋)를 신은채로 궁정(宮庭)에 오르시니 태조(太祖)가 손을 잡고 연접(延接)하며 말하기를, "초초(草草)하구려. 전일의 당당(堂堂)한 기상(氣像)은 없으나 옛적의 엄용(嚴勇)한 기상(氣像)은 변치 않았도다."하고 수일(數日)을 담소자약(談笑自若)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금번(今番) 낙성연(落成宴)에 친구(親舊)를 위하여 거문고를 타서 조정(朝廷)에 있는 여러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함이 어떠한가? 하고 청(請)하자, 공(公)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선왕(先王)의 경연(慶宴)에도 여러분이 청(請)하였지만 사양하고 거문고를 타지 않았음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왕(王)의 소청(所請)을 따른다면 다음에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왕(先王)을 지하에서 뵙겠는가."하였더니 태조가 말하되 "일찍이 송악(松嶽)의 경연(慶宴)에는 공(公)은 거문고(琴)를 타고, 나는 장구(長鼓)를 치고, 정몽주(鄭夢周)는 퉁소(嘯)를 불고, 이색(李穡)은 노래하고, 황희(黃喜)는 춤을 추었는데 어찌 금일(今日)에는 거문고 한 곡(曲)을 아끼는가."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그때는 동학고구(同學故舊)를 더불어 각각 그 장기(長技)에 따라 소요(逍遙)한 것이나 금일(今日)은 한양(漢陽)이지 송악(松岳)이 아니며, 낙성연(落成宴)이지 소요(逍遙)가 아니며, 이시중(李侍中)이 왕(王)이 되니 포은 (圃隱)은 피살(被殺)되어 천대(泉臺)에서 함분(含憤)하고 주상(主上)이 봉군(封君)되어 간성(杆城)에서 원한(怨恨)을 품고 계시니 노부(老父)가 비록 불충(不忠)하나 세세(世世)로 왕씨(王氏)의 녹(祿)을 먹은 내가 어찌 오늘 이시중(李侍中)을섬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조(太祖)가 송구(悚懼)한 기색(氣色)을 보이자 권근(權近)과 황희(黃喜)가 머리 숙여 간(諫)하기를 조전서(趙典書)의 절개(節慨)는 가(可)히 굴(屈)치 못할 것이니 돌려보냄이 마땅하다 고 말하니 태조가 이를 허락했다. 그 해 태조가 폐위(廢位)한 공양왕(恭讓王)을 죽이자 공(公)은 여러사람과 더불어 그 시체(屍體)를 거두어 장례(葬禮)하고 3년을 복상(服喪)하였다. 【출조선사(出朝鮮史)】

정종(定宗) 원년(1399년)에 상왕(上王) 이성계(李成桂)의 어진(御眞)을 그리기 위해 정종(定宗)이 백관(百官)들에게 누가 그림을 잘 그리는가."하고 물으니 모두 조전서(趙典書)를 천거(薦擧)하였다. 공(公)은 청(請)하여도 쉽게 올 사람이 아니 라는 것을 잘 아는 정종(定宗)은 선생(先生)의 예(禮)로 손수 편지를 쓰고 예물(禮物)을 갖추어 내관(內官)을 함안(咸安) 으로 보내고 고을 수령(首領)에게 그 행차(行次)를 보살피도록 어명(御命)을 내렸음에도 공(公)은 전일(前日)을 생각하여 칭병(稱病)을 핑계로 왕명(王命)을 사양하고 예물(禮物)을 돌려보냈다.

내관(內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함안(咸安)에 계속 머물러 있고 정종(定宗)이 편지를 거듭하여 보내니 공(公)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상경(上京)하여 창덕궁(昌德宮)에 도착하자 흔연(欣然)히 삼 일간 환대연(歡待宴)하고 정종(定宗)이 말하기를 상왕 (上王)의 어진(御眞)을 모시고자 하는데 앞서 그린 어진(御眞)은 수법(手法)이 모호(模糊)하여 제대로 표현(表現)하지 못하였도다. 부왕(父王)은 공(公)의 오랜 친구이니 선생(先生)께서 진상(眞相)을 그려주시면 묘중(廟中)의 보물(寶物)로 삼아 선생의 공(功)을 기념(記念)하고자 하노라 고 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앞서 공민왕(恭愍王)의 어용(御容)을 그리고자 할 때에는 내가 간(諫)하기를 문장(文章)으로 상(上)을 섬기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마땅하나 화도(畵圖)로써 하(下)를 시키는 것은 군(君)의 도리(道理)가 아니라고 하여 왕명 (王命)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비록 천(賤)하나 전일 이시중(李侍中)은 그릴지언정 금일 이상왕(李上王)은 못 그리겠다.고 답하니 정종(定宗)이 크게 노(怒)하여 꾸짖자, 공(公)은 정색(正色)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임금을 죽였으니 이는 왕씨(王氏)의 역적(逆賊)이요 만민(萬民)의 원수라. 왕(王)의 부자(父子)는 위(魏)나라 사마의(司馬懿) 부자와 같으니 어찌 충신(忠臣)을 꾸짖는가.하였다.

정종(定宗)이 크게 노(怒)하여 공(公)을 투옥(投獄)하자 공(公)은 죽기를 맹세(盟誓)하고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태조(李太祖)가 이를 알고 나의 고조(高祖) 목왕(穆王)과 조전서(趙典書)의 고조(高祖) 문학공렬(文學公烈)은 고려(高麗) 원종조(元宗朝)에 같이 벼슬을 하여 교계(交契)가 두텁고, 시문(詩文)이 아직 안협(案峽)에 있으며, 또한 나와 사귄 지가 오래이니 혹(或) 대죄(大罪)가 있어도 마땅히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금화(琴畵)의 두 일은 전후개결(前後介潔 )이 이와 같으니 방면(放免)하라고 말하였다.【출조선사(出朝鮮史)】

문경공(文敬公) 이채(李采)께서 쓴 신도비명(神道碑銘) 가운데 만은 홍재(晩隱洪載)의 글이 나오면서부터 공의 은덕 미행(隱德微行)이 점점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글에 하루밤에 판서 성만용(判書成萬庸), 평리 변윤(評理卞贇), 박사 정몽주(博士鄭夢周), 전서 김성목(典書金成牧), 전서 조열(典書趙悅), 제학 홍재(提學洪載), 대사성 이색(大司成李穡), 진사 이오(進士李午) 등이 기약없이 모여 잔잡고 회포(懷抱)를 의논 할 때 이색은 은(殷)나라에 삼인(三仁)이 있어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달아나고 기자(箕子)는 종(奴)이 되어 각자 뜻에 따라 행하였다고 하니 만은 홍재는 삼가 대평촌(大坪村)에 가서 동명(洞名)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고 오직 조전서와 진사 이오는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서로 오고 가며 세상을 슾어하였다 【출조선사】

공의 묘는 방어산(防禦山) 동록(東麓) 건좌(乾坐)에 後夫人 아산장씨묘(牙山蔣氏墓)는 공묘부(公墓祔) 상우 동원(上右同原)이고 초배곤양전씨묘(初配昆陽田氏墓)(공묘우설단:公墓右設壇)는 실전(失傳)이다(원북재묘역:院北齋墓域)

고려가 망하자 두 공은 운구(雲衢)에 모여 전왕(前王)을 조문(弔問)하고 슬피 노래하며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