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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헌공(大笑軒公) 諱 종도(宗道) 壽萬-應卿-堰-宗道

1) 행장(行狀)
함안조씨십삼충(咸安趙氏十三忠)의 한분으로 자(字)는 백유(伯由), 호(號)는 대소헌(大笑軒)으로 중종(中宗) 32년(1537년) 2월 5일에 태어나 명종(明宗) 13년(1558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천거(薦擧)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 뒤 사도시 직장(司導寺直長),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등을 역임(歷任)하고, 선조(宣祖) 16년(1583년)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다. 선조(宣祖) 20년(1587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歷任)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謨反事件)에 연루(連累)되어 투옥(投獄)되었다가 무고(誣告)함이 밝혀져 석방(釋放)되었다.
선조 25년(1592년)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영남(嶺南)으로 돌아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함께 창의(倡義)하여 의병모집(義兵募集)에 진력(盡力)하였고, 그 해 가을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냈으며, 선조 29년(1596년)에는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명(命)을 받고 안의현감(安義縣監) 곽준(郭逡)과 함께 의병(義兵)을 규합(糾合),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수축(修築)하고 성(城)을 지키면서 가토키요마사(加藤淸正)가 인솔(引率)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그해 8월 18일 정부인전의이씨(貞夫人全義李氏)와 함께 순절(殉節)하시니 향년(享年) 61세이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봉(奉)해지고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文集)으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엠파스한국학 (http://koreandb.kdaq.empas.com// 한국의 역대인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선조 18년(1585년)에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계시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선조 21년(1588년)에 문경현감(聞慶縣監)을 지내셨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초유사 김성일(招諭使金誠一)을 도와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義兵)을 모았고, 선조 30년(1597년) 8월에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사절(死絶)하였으며, 숙종(肅宗) 34년(1708년)에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2) 묘소(墓所)

묘소(墓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건좌(乾坐)
배정부인전의이씨묘(配貞夫人全義李氏墓) : 합장(合葬)
3) 선적(先蹟)

오산재(梧山齋) : 대소헌선생휘종도묘각(大笑軒先生諱宗道墓閣)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공의 묘소 아래에 있다.
대소헌세장(大笑軒世庄)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65호(1986.8.6)로 지정(指定)된 산청소남리조씨고가(山淸召南里趙氏古家)는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곡간채, 사당(祠堂)이 ㅁ자형배치(口字形配置)를 하고 있고 바깥에서 안으로 사랑채와 안채 사당의 순으로 배열(配列)되어 사대부 주택(士大夫 住宅)의 공간적 위계(空間的 位階)가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의해 잘 지켜져 있다.

안채는 정면(正面) 6칸, 측면(側面) 2칸의 3량구조(樑構造) 팔작(八作) 집으로 남부일자형평면(南部一字形平面)가운데 가장 큰 규모(規模)에 해당(該當)한다.
사랑채는 ㄱ자형(字形) 평면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동측(東側)으로 돌출(突出)한 2칸은 대청(大廳)과 누(樓)마루로 구성(構成)되어있다. 특히 마루에는 3면(三面)에 계자난간(鷄字欄間)을 두르고 열개 분합문(分閤門)을 설치하여 개폐(開閉)를 자유롭게 하도록 하였으며 하부초석(下部礎石)은 8각형(八角形)으로 마감하여 누각(樓閣)의 격식(格式)을 갖추었다. 사당(祠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맞배집으로 익공계(翼工系) 건물로 단청(丹靑)이 칠해져 있다. 사랑채의 종도리 장혀의
상량문(上樑文)에 가정(嘉靖) 9년 경인(庚寅) 창기(창基)로 기록되어 있어 1890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이 집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안의(安義) 황석산성에서 장렬(壯裂)하게 순절(殉節)하신 통훈대부행함양군수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通訓大夫行咸陽郡守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지내신 충의공(忠毅公)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의 세장(世庄)이다. 이 세장(世庄)은 공의 조부(祖父)이신 하구정공(下鷗亭公) 諱 응경(應卿)께서 택지(擇地) 세거(世居)하신 곳으로 가묘(家廟[祠堂])는 광해군(光海君) 8년(1616년)에 건립(建立)하였고, 안채는 인조(仁祖) 6년(1627년)에 상량(上樑)하고 1927년에 중수(重修)하였으며, 사랑채는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상량하고 1917년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소헌선생신도비각(大笑軒先生神道碑閣) : 상동(上同)
대소헌선생신도구비(大笑軒先生神道舊碑) : 상동(上同)

황석산성(黃石山城) 혈암(血巖)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황석산(黃石山) 황석산성(黃石山城)에 있는 혈암(血巖)은
일명 "피바위"라고 하며, 대소헌선생(大笑軒先生)께서 사절(死節)하신 곳이다.
쌍절각(雙節閣)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慶尙南道 咸安郡 郡北面 院北里)에 있는 쌍절각(雙節閣)은 대소헌선생충의공휘종도 정려(大笑軒先生忠毅公諱宗道旌閭)와 배정부인전의이씨정려(配貞夫人全義李氏旌閭)이다.
4) 언행록(言行錄)

임진년(壬辰年) 봄에 공(公)이 한양(漢陽)에 올라가니 미구(未久)에 난(亂)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노(李魯)와 함께 밤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찾아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노(李魯)와 약속(約束)하기를 "창의(倡義)에 앞장서서 통문(通文)을 내어 모병토적(募兵討賊)하기로 하고, 만일 일이 여의(如意)치 않으면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으면 놈들의 욕(辱)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니 이노(李魯)가 말하기를 "누구와 같이 죽을 것인가?"하고 물으니 공(公)이 답하기를 "다른 사람은 불가(不可)하지만 정덕원(鄭德遠), 김지해(金志海), 박덕응(朴德凝) 등은 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할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은 초유사(招諭使)로서 함양(咸陽)에 왔다. 두 사람은 불기지회(不期之會)의 만남에 학봉(鶴峯)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공(公)을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였다.【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김성일(金誠一)은 공(公)을 의령가수(宜寧假守)에 임명하였다. 공(公)이 의령(宜寧)에 달려와 보니 이미 곽재우(郭再祐)가 기병(起兵)하였으므로 공(公)은 의령가수의 직(職)을 곽재우(郭再祐)에게 넘겨주고 함양으로 돌아왔다. 김성일(金誠一)을 보고 말하기를 "중로(中路)에서 들으니 한양과 평양(平壤)을 지키지 못하여 상감(上監)의 거가(車駕)는 압록강(鴨綠江)을 넘어갔다 하니 나라가 망(亡)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강(江)을 굽어보고 몸을 던지려고 하자, 김성일(金誠一)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옳지 못하다. 길가에서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또 그렇게 헛되게 죽어 무슨 이익(利益)이 있겠는가?"하니 공(公)이 옳게 여겼다. 그때 임금은 의주(義州)로 행행(行幸)하였다.
공(公)은 의병(義兵)의 공(功)으로 검정(檢正)의 관직(官職)이 내려졌다.【신도비(神道碑)】
선조 29년(1596년) 함양군수(咸陽郡守)에 취임(就任)하였다. 선조 30년(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왜군(倭軍)이 전라도(全羅道) 방면을 침입(侵入)해 왔다. 공(公)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청(請)하여 일군(一郡) 병민(兵民)을 산하(傘下)에 소속(所屬)시켜 죽음으로써 항전(抗戰)하기로 하고, 병민(兵民)을 거느리고 험악(險惡)한 지대(地帶)를 점거(占據) 사수(死守)하였다. 그러던 중에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라는 명(命)을 받고 안의현감 곽준(郭逡)과 함께 성루(城壘)를 보완(補完)하고 작전(作戰)을 꾀하던 차에 공(公)이 함양으로 체임(遞任)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성(守成)은 위험(危險)하고 또 관수(官守)도 없으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내 이미 죽음으로서 국가(國家)를 지키고자 맹세(盟誓)하였고, 적(敵)이 이미 육박(肉迫)하였는데 의리상(義理上) 떠날 수 없다."고 하니 자제(子弟)들이 처음에는 빨리 길을 떠나려고 하다가 공(公)이 하는 의(義)로운 말을 듣고 모두 공(公)의 뒤를 따랐다. 주장(主將) 백사림(白士霖)은 "성(城)이 높고 험준(險峻)하니 적(敵)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더니 적(敵)이 성(城)에 박도(迫到)하자 밤에 몰래 성(城)을 열고 달아났다. 이로 인(因)해 성이 함락(陷落)되었다.

곽준(郭逡)이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하겠소."하고 물으매, 공(公)이 답하기를 "죽을 따름이다."하고 곧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서향재배(西向再拜)하고 곽준(郭逡)과 함께 동일(同日)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서원(書院)은 함안(咸安) 덕암(德岩)에 있고, 충렬사(忠烈祠)는 안의에 있다. 황암(黃岩)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공(公)은 우락불기(牢落不羈)하여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일찍이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지킬 때 적(敵)의 선봉(先鋒)이 척후(斥候)를 보낼 즈음, 학유(學諭) 윤선(尹銑), 진사(進士) 박천우(朴天佑)와 같이 밤에 술을 마시다가 분개(憤慨)하는 시(詩)를 지었다.

공동산(崆峒山) 밖에 사는 것이 비록 즐거우나 순(巡), 원(遠) 성중(城中)에서 죽는 것 또한 영화(榮華)롭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안기찰방(安寄察訪)에 있을 때 왜국(倭國)은 현소(玄蘇)를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현소(玄蘇)가 시(詩)로서 우리를 시험(試驗)하며 때로는 거만(倨慢)을 떨었는데, 공(公)이 지은 시(詩)를 보고는 재배(再拜)하고 읽었다. 공(公)은 총명(聰明)하여 제자백가설(諸子百家說)을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記憶)하였고, 문장(文章)이 도도(滔滔)하여 애써 다듬으려는 뜻이 없었다.

공은 의모(儀貌)가 괴석(魁碩)하여 언론에 구속(拘束)을 받지 않았고, 분발(奮發)하면 뇌성(雷聲)과 같이 엄숙(嚴肅)했고 좌중(座中)에 바람이 일면 좌중(座中)은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여 들었기에 사람들이 자못 공을 꺼렸다. 성품(性品)이 술을 좋아하여 한잔 마시면 크게 웃으셨고, 주석(酒席)이 파(罷)하지 않으면 웃음 또한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號)를 대소(大笑)라고 하였다.【유사(遺事)】

공의 장인(丈人)은 판서(判書) 이준민(李俊民)은 남명(南冥) 조식선생(曺埴先生)의 매서(妹壻)이다. 공의 장인이 일찍이 사람들과 말하기를 "동국(東國)의 인물(人物)은 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공(公)과 같은 인물을 사위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寒岡) 정술선생(鄭逑先生)이 만시(輓詩)로써 곡(哭)한 글에,

영남당당우(嶺南堂堂友)
심웅기역호(心雄氣亦豪)
경문왕촉사(驚聞王燭死)
긍작첩산도(肯作疊山逃)
의열부인기(義烈扶人紀)
영풍장본조(英風壯本朝)
평생담소처(平生談笑處)
강활벽천고(江闊碧天高)

영남(嶺南) 밖 당당(堂堂)한 벗
마음은 웅대(雄大)하고 기(氣) 역시 호협(豪俠)하구나.
왕촉(王燭)이 죽었다고 들어 놀라고,
즐겨서 첩산(疊山)에 도망갔다고
의열(義烈)은 인기(人紀)를 부지(扶持)하고
영풍(英風)은 본조(本朝)를 장(壯)케 했구나.
평생(平生) 담소(談笑)하는 곳에
강(江)은 넓고 벽천(碧天)은 높았도다.

세인(世人)은 이 구절(句節)로 공의 기상(氣象)을 잘 묘사(描寫)하였다고 말한다.【사우록(師友錄)】

전(傳)에 말하기를, 조종도(趙宗道)의 자(字)는 백유(伯由)로 함안에 산다. 사람됨이 걸림이 없고 대중(大衆) 앞에서 해학(諧謔)을 잘하며, 항상(恒常) 말할 때는 많이 웃는다고 하여 자호(自號)를 대소자(大笑子)라 했다. 밖으로는 철탕(鐵湯)함 같으면서도 안으로는 확고(確固)한 지킴이 있어 녹록(碌碌)한 사람 뒤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일찍 추천(推薦)으로 안기찰방이 되어 나와 사귀어 놀면서 매우 경애(敬愛)하였다. 임기(任期)가 만료(滿了)되자 양지현감에 승진(陞進)되었다. 재임(在任)중에 치적(治積)이 많아 여러 현(縣)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認定)받았다.

그러던 중 어떤 사유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歸鄕)하였다. 수년 후에는 기축역옥(己丑逆獄)을 겪었다. 백유(伯由)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제보(提報)로 체포(逮捕)되어 왕옥(王獄)에 갇히고 고문(拷問)을 받다가 구제(救濟)한 사람들의 덕(德)으로 풀려났다. 공(公)이 체포(逮捕)되자 사람들은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고 하여 친구(親舊)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餞送)하는데 백유(伯由)는 언소자약(言笑自若)하였다. 임진(壬辰), 계사(癸巳) 왜란(倭亂)이 극심(極甚)할 때 백유(伯由)를 안의현감으로 명(命)하였으나 병(病)으로 사임(辭任)하였고, 또 함양군수가 되었으나 또 병(病)으로 물러났다.

선조 30년(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열읍(列邑)이 바람소리만 듣고서도 분궤(奔潰)하여 한 사람도 성(城)을 지키는 자(者)가 없었다. 그런데 안의현감 곽준(郭逡)이 홀로 황석산성을 용치(茸治)하면서 이민(吏民)을 이끌고 고수(固守)하고자 하니 백유(伯由)가 말하기를 "내 대부(大夫)의 뒤를 쫓아서 비록 관수(官守)의 책임(責任)은 없으나 분찬(奔竄)의 무리와 같이 초간(草間)에 썩지 않을 것이다. 죽을진대 마땅히 명백(明白)하게 죽을 따름이다. "하고 곽준과 함께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입성(入城)하여 남문(南門)을 지키며 왜적(倭賊)과 싸운 지 하루 만에 성(城)이 무너지고 왜적이 입성(入城)하매 백유(伯由)와 곽준은 같이 해(害)를 입었다.

백유(伯由)의 처(妻) 이씨(李氏)는 고판서(故判書) 준민(俊民)의 딸로 또한 함께 죽었다. 아들 영한(英漢)은 왜적의 포로(捕虜)가 되어 일본(日本)으로 끌려갔다가 1년 만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그의 부친(父親)의 체골(體骨)을 성중(城中)에서 찾아 장사(葬事)하고 난 뒤 수일 만에 상복(喪服) 유연(悠然)한 모습으로 나를 하회리(河回里) 집에 찾아와 그 지난 일을 말하면서 서로 최통(?痛)했다.

오호(嗚呼)라! 사람은 진실로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죽을 곳을 얻는 것이 어렵지만 백유(伯由)는 죽을 곳을 얻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백유(伯由)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다. 홀로 내 평생에 백유(伯由)의 마음을 믿고 그 열렬(烈烈)한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을 알고 있었다. 이제 과연 입절(立節)이 이와 같았으니 "질풍(疾風)에 경초(勁草)를 알고, 판탕(板蕩)에 충신(忠臣)을 안다."고 하였으니 진실하다 이 말이여.

서애(西崖) 유성룡찬(柳成龍撰)】

배(配)는 정부인전의이씨(貞夫人全義李氏)로 판서(判書)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의 딸로서 공과 같이 황석산성에 있었다. 성이 함락(陷落)되자 두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조씨(趙氏)로 하여금 절사(絶祀)치 말게 하여라. 나는 의리상(義理上) 떠날 수 없다."하고 공과 함께 동사(同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