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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북재중수기(정재기)

함안의 삼십리 지경에 방어산이 있다. 꾸불꾸불 뒤 엄켜 흘러내리면서  신령스런  정기가 매쳐진 곳에 마을이 있으니 금은선생 조공의 처음 삶의 터전이며  사척 가량 되는 무덤이 그 동쪽 산록에 있으며 조금 동편에 공의 재실이 있다. 공의 손자인 정절공의 조묘(祧廟)가 그 뒤편에 있으며 원북재라는 재호(齋號)는 지명을 인용한 것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 여러 번 중수하였으나 아직 기문이 없었다. 어느 날 조씨 문중에서 기문 지어주기를 청해오니 나는 이미 늙어 글쓰기를 폐한지가 오래되었으나 외손으로서의 의무감으로 감히 사절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집안의 시조가 되는 분의 근원과 계통은 반드시 발라야 할 것이며  발라야 만이 그 기맥과 고상한 인품과 멋스런 풍채의 이어짐이 수십세 천백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것을 조씨의 집안애서 그 징험(徵驗)을 볼 수 있다.


금은선생은 고려 말에 공조전서로 재직 중 왕에게 직간(直諫)한 것의 연유로 내침을 받아 함안으로 내려 왔었다. 항상 홍만은공과  이모은공을 더불어 국사를 걱정하고 상심하면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서로가 지은 연구(聯句)시에 이르기를
"깊숙한 대밭 속 몇 떨기 꽃, 산촌 적막한 집 곱게도 꾸몄네, 방에 들어가 보니 두루미에 술이 가득, 벼슬 하고픈 생각 비단처럼 엷어 졌다오.” 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삼공이 운구에 모여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맥수 채미가와 비유하였다.


조선 태조가 옛날의 관직으로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거문고와 그림의 솜씨가 뛰어남을 알고 청했으나 따르지 아니하고 소신대로 살면서 생을 마치니. 포은과 목은 등을 더불어 사생(死生)이 같지 안했으나 나라를 잃은 신하의 의리 지킴이 해와 별 같이 밝았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 근원의 계통이 이와 같았으므로 정절공이 손자로 태어났으며 그 뒤 국가의 위난 시에 공을 세우고 순절한 자가 아주 많아 온 나라 안에 칭예(稱譽)가 혁혁하며 세정이 상전벽해처럼 바뀌어 모두가 어리석게 된 이 시점에도  도도한 그 속에 의리를 꼿꼿하게 세워 지키는 자 많으니 난초에는 근원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진저! 오직 조씨는 각자가 노력하여 그 뿌리를 더욱 더 북돋아 배양한다면  장차 옛날처럼 그 기맥과 고상한 인품과 멋스런 풍채를 무궁하게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조씨의 충의(忠義)는 천지와 더불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묘년(1939.) 삼월에 안동 권재규(權載奎)는 삼가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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