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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서당기(정재기)

요순(堯舜)은 천하를 정(靜:평화)으로써 이루 켰으며 탕무(湯武)는 천하를 전(轉:변화)으로써 이루 켰다. 변화는 곧 천리이다. 백이는 말하기를 평화라야 천리가 된다하여 손을 들고 변화는 폭력이니 폭력을 실행해서는 이니 된다고 하며 서산과 더불어 하늘에 높이 서서 천하에 떳떳함을 표현하였다.


서쪽에 있는 천하의 많은 산중에 화산(華山)은 천자가 제사를 올리는 오악(五嶽)중의 한 진산(鎭山)이요 기산(岐山)은 봉황새가 울고 있는 신령(神靈)스런 명산(名山)이다. 홀로 수양산만을 서산이라 부르며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서산이라고 하는 것은 백이의 채미가에 “저 서산에 올랐다.”는 노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아! 천지간의 정직한 기운은 고금을 따지지 않고 부족하지 않으며 오랑캐 나라이거나 중국이냐를 가림이 없이 공허 할 때가 없으며 나라가 망해도 함께 망하지 않으며 세상이 변해도 함께 변하지 않고 뒤를 이어 다시 발현되나니 백이의 후에 그렇게 실천한 사람은 능히 몇 사람이었던가?
한(漢)나라에는 유북지(劉北地),요 진(晉)나라에는 도연영(陶淵明),이요 송(宋)나라에는 문문상(文文祥),이요  명(明)나라에서는 방효유(方孝儒),제공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 정포은(鄭圃隱)선생과 길야은(吉冶隱)공 두 분이었고 조선조에서는 단종조의 생사 육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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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 [ 堯 ]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史記등에 의하면 요는 성을 도당(陶唐), 이름을 방훈(放勳)이라고 한다. 오제(五帝)의 하나인 제곡(帝嚳)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제위에 오르자 희화(羲和) 등에게 명하여 역법(曆法)을 정하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순을 등용하여 자기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천하의 정치를 섭정(攝政)하게 하였다. 요가 죽은 뒤,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을 추대하므로 순이 천자에 올랐다


1~1)순(舜)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으로 5제(帝)의 한 사람
유덕한 성인으로서 선양(禪讓) 설화(說話)의 대표적 인물이며 요(堯)·우(禹)와 병칭되고 있다. 《사기(史記)>>


2) 탕 [ 湯王 , ?~? ]중국 고대 은(殷)나라를 창건한 왕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은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왕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亳)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 ‘혁명’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2~2) 무 [ 武王 , BC 1169 ?~BC 1116 ]
무왕은 문왕과 함께 성왕(聖王)으로 추앙되며, 그가 은나라를 친 군사행동은 포악한 군주를 응징하고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평가되며, 유교(儒敎)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정당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3) 유북지(劉北地), 촉한(蜀漢)後主의 아들 심(諶)을 이름. 후주가 진(晉)나라에 항복하자 자살하였음


4) 문천상 [ 文天祥 , 1236~1282 ]중국 남송의 정치가, 시인.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 문산(文山). 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출생. 1255년 진사에 수석합격하였다. 1259년 몽골군의 쓰촨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경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후에 복직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이듬해 원(元)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수도 임안(臨安)에 다다르자 문관으로서 근왕병(勤王兵) 1만을 이끌고 임안 방위에 급히 참가, 분전(奮戰)하였다. 송(宋)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원나라의 총수(總帥) 백안(伯顔)과 회견, 항론(抗論)하다가 구류되었다. 그 동안에 임안은 함락되고, 송나라는 멸망하였다. 포로가 되어 북송(北送)되던 중 탈주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제왕을 칭하고 있던 탁종(度宗)의 장자 익왕(益王)을 받들었다. 잔병(殘兵)을 모아 싸웠으나 廣東省 오파령(五坡玲)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도(大都: 北京)로 송치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벼슬을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 사형되었다. 시(詩)에도 능하여 옥중(獄中)의 작 《정기가(正氣歌)》로 유명하다. 문집에《문산전집》이 있다.


5) 방효유 [ 方孝孺 , 1357~1402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
자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 손지(遜志). 浙江省 닝하이현[寧海縣] 출생. 방정학(方正學)이라고도 한다. 송염(宋濂)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다. 평소부터 王道를 밝히고 태평(太平)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세속적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02년 연왕(燕王: 뒤의 永樂帝)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詔)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다.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고, 일족과 친우 ·제자 등 847명이 연좌되어 죽었다고 한다. 저술에 《주례변정(周禮辨正)》 등 몇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영락제에 의해 소각되고, 《손지재집(遜志齋集)》(24권)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7권)이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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