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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재창건기(정재기)

기해년(1779.)의 가을에 나는 집안의 어른 희륭(希隆)씨와  조카인 순구(舜九)씨와 더불어 응암의 기슭에 선조를 위해 재실을 지었다.


묘소에 재실을 짓는 것은 그 선조를 추모하여 제사를 모시고 그 산소를 수호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어계선조께서는 단종조에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 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절의를 지켜 세칭 생육신으로 서산서원에서 향례를 올리니 백세청풍의 기풍이 세상의 교화에 크나큰 공을 미쳤다.


우리들 자손은 더욱더 정성을 들여 앙모(仰慕)해야 할 것이다. 이곳 응암은 어계선조의 유택이 계시는 곳이나 아직 재실도 없으며 다만 묘지기를 두고 묘소를 수호하는데 인심이 옛날 같지 않고 풍속은 점점 퇴폐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산소의 위치가 함안과 의령의 경계여서 나무꾼들의 남벌로 아름드리의 나무는 백주도 못되니 지나는 사람들도 어계선생의 묘소가 이처럼 수호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었다.


또 한해에 한차례 올리는 묘사도 초겨울에 모시니 해는 짧고 길은 멀어 먼데서 온 자손들은 되돌아가야 하기에 많이 참례를 못하고 왕왕 소임 두셋이  제주를 드리니 불경함이 그지없었다.


이는 곧 재실이 없어 여러 일가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대 부형들께서 이를 매우 걱정하여 재실을 지어 산소를 수호하려는 뜻이 없지 않았으나 순탄히 실행하지 못하여 그 계획이 후생들에 이어지게 되었다. 이해 삼월의 조묘 향례시 노소가 회동 합심하여 재실 짓기를 상의하여 우리 세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을 맡아 짓기를 결정하였다. 내 비록 아는 것은 없으나 선조를 위하는 일이라  의리상 사양할 수없었다. 봄에는 농사일이 바빠 착공을 하지 못하고 초가을 김매기가 끝날 무렵 목수를 불러 쓸만한 재목을 알아보니 가까이에서는 보와 기둥의 재목을 구할 수 없었다. 여럿이 큰 절을 찾아다녀 수 십주를  구했으나 각처에 산재했기에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지방인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이 재실의 역사를 어찌 도우지 않으랴하고 기꺼이 승낙하였다.


서로가 힘을 합쳐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십리를 잇고 오리를 이어 차차 옮겨졌으니 이에 선현의 유풍이 능히 무식한 자도 감복시킴을 알 수 있도다. 사람들이 모여 착공은 하였으나 재정의 뒷받침이 없으면 경영하기가 어려워 사무소에서 종중에 통문을 내어 재실의 건립사업에 필요한 경비염출 등의 일을 맡을 간사를 선출케 하여 문중의 부형과 아들 조카 등에게 분담금을 부가하여 정한 기간 내에 납부 해줄 것을 각파에 통고하였다. 재경 종족이 의론하여 시골에 사는 종족들에게 알려 거두어들인 재물이 수 백량이 되었다. 긴요하게 쓰며 절약하였으나 비용을 다 충당치 못하고  재정이 모자라 착공 한 후 십년을 넘겨 서야 재실이 준공되었다. 그 구조나 규모는 크고  넓어 가히 백여명을 수용할만하였다.


그해의 시사에 원근의 자손이 재실에 함께 모여 조손과 형제 간의 서열대로 제사를 모시고 돈독히 나눈 정의는 참으로 즐거웠었다. 선조의 위치에서 볼 때 모두가 한 자손이니 비록 분파가 되어도 서로가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장차 묘소도 빛이 나고 영령(英靈)도 편안 할 것이며 뫼를 둘러선 나무는 남벌 되지 않아 무성할 것이요 많은 자손이 산소아래 모여 재계하며 제사를 모신 후 하루 밤을 묻게 되면 재실 있는 평안함은 말로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 종중의 젊은이들이 이 재실을 활용하여 독서하고 강학하면 이 곳에서 많은 성취를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니 학업은 해를 이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겠으며 종족 삼백명 중에서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배출 될지 알 수 없으니 어찌 자손들의 제사 모시는 곳만으로 끝이리오.? 나는 이점을 다시 염려하여 땔감이나 반찬을 마련하는 방도를 세웠다. 남포 강가의 갈대를 못 베게 하여 가꾼다면 땔감은 넉넉할 것이요 야산의 터 밭에 채취한 수확으로 김치와 장을 담는다면 공부하는 자의 반찬공급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공부를 하기 위해 오고 아니 옴은 현(賢) 불초(不肖)에 달렸을 뿐이니 내가 이를 어찌 하랴?
오늘의 이 기록은 사람들에게 생색을 내려 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오는 자들에게 자초지종 사연을 알리고자 할 뿐이다.


정조 삼년(1779.)  십세손 원중(元中)은 삼가 기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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