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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보서문

그리고, 성(姓)은 다르나 외손은 한 조선의 핏줄인즉 수보 과정에서 빠뜨려서는 아니 되겠으나 생각해보니 세대가 오래됨에 외손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비단 보고 들은 것만으로 기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일 뿐 아니라 재삼 보첩에 부기하는 번거로운 점도 있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다 선조의 외척이며  혼인 내용을 봐도 다 한 사람의 후예이니 이를 다 싣는 것은 너무 번잡하지 않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삭제함이 옳을 것 같아 여자의 출가 내용만 실었으니, 이퇴계 황(李退溪 滉)선생의 강론 한 바와도 같게 되며 번잡하고 혼란한 폐단(弊端)도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옛적의 예를 임의로 고친 것은 미안하나, 잠정적으로 구보와  조금 한계와 제한을 두었으며 또 외손과 증손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뒤 사람이 함께 보도록 하였다. 친족간의 친한 정이 줄어가는 사실은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그러나 효도와 우애 친족간의 화목과 행동거지의 돈독함에 이르러서는 그의 선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형제(兄弟) 숙질(叔姪) 족조(族祖) 족손(族孫)으로 파(派)가 나누어짐에 따라 점차  소원(疏遠)해지는 정의(情誼)를 변치 않고 유지함은 어질거나 그렇지 못 하느냐의 인성(人性)에 달려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족보인들 이를 어찌 할 수 있으랴?


광해군 구년 정사(1617)겨울에
함안 후손(後孫) 임도(任道)는 서(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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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 [ 李滉 , 1501~1570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상
북도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1568년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하였으며,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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