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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천(趙壽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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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절도(節度)공 조 수 천(趙 壽 千).1482(성종.13)∼1553(명종.8)
- 조선조 초기의 무관
- 자(字)는 중수(仲叟)
- 호는 북계(北溪)
- 어계선생의 손자
- 1503년(연산.9)에 무과에 등제
- 1506년(중종.1)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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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節度)공 조 수 천(趙 壽 千).1482(성종.13)∼1553(명종.8) 조선조 초기의 무관. 자(字)는 중수(仲叟)며 호는 북계(北溪)요 어계선생의 손자며 좌윤공 금호(金虎)의 차자이다. 1503년(연산.9)에 무과에 등제하여1506년(중종.1)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원종일등훈(靖國原從一等勳)에 녹권 되었다. 함흥부사와 밀양부사를 거쳐 내직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한 후 충청병마사(忠淸兵馬使)에 배명 되었으며 만기 후에 경상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를 지냈다. 함흥의 락민루(樂民樓)에는 공이 지은 중수기문과 사운율시(四韻律詩)가 현판에 새겨져 걸려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뛰어났으며 장성함에 이르니 성품이 강직하고 풍채가 늠늠(凜凜)하고 당당하며, 무예가 출중하고 의지(意志)가 굳건하였다. 공이 宣傳官으로 재직 중인 25세 시(1506년) 난정(亂政)을 거듭한 연산군(燕山君)을 폐위(廢位)하고 중종(中宗)을 옹립(擁立)하려는 판서(判書) 유순정(柳順汀), 정광필(鄭光弼), 성희안(成希顔), 지중추(知中樞) 박원종(朴元宗) 등 제공(諸公)이 밀계(密計)를 맹약(盟約)하기 위하여 9월 3일에 훈련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부친 좌윤공은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으로 재직 중이었었다. 제공(諸公)이 공의 지기(志氣)가 용예(勇藝)함을 칭찬하고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이 암군(暗君)을 몰아내고 현주(賢主)를 옹립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여기에 협찬(協贊)하기를 당부하며 말하기를 “이 중대한 사안을 그대가 아니면 누가 감당할 것인가.”하였다. 공은 분발(奮發)하여 정국동맹(靖國同盟)에 앞장서고 특히 반정의 큰 공을 세우니 중종이 가상(嘉尙)히 여겨 입시(入侍)를 명(命)하고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난세(亂世)를 만나 지절(志節)을 지키기는 쉬우나 기우러지는 나라를 붙들고 바로 잡기는 어렵다.”고 친찬 하였으며, 1507년(중종 .2)에 나라에서는 전지(傳旨) 와 함께 녹권(錄券)을 하사하고 정충록(精忠錄)을 포사(褒賜)하였으나 종가(宗家)에서 보관하던 중 안타깝게도 화재(火災)로 모두 소실(燒失)되었다. ---------------------------------------------- 1) 곽광 [ 霍光 , ?~BC 68 ]전한(前漢)의 정치가 자 자맹(子孟). 하동 평양(河東平陽: 山西省臨汾縣) 출생. 무제(武帝)를 측근에서 섬기다가,무제가 죽을 무렵에는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박륙후(博陸侯)가 되었으며, 후사(後事)를 위탁받았다. 무제가 죽자 8세로 즉위한소제(昭帝)를 보필하여 정사(政事)를 집행하였으며, BC 80년 소제의 형인 연왕(燕王) 단(旦)의 반란을 기회 삼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소제가 죽은 후에는 그를 계승한 창읍왕(昌邑王)의 제위를 박탈하고, 앞서 무고(巫蠱)의 난 때 죽은 여태자(戾太子)의 손자를 옹립하여 선제(宣帝)로 즉위하게 하는 등 여러 군주를 바꿨다. 선제는 곽광이 죽은 후 그의 일족을 반역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렸다. ----------------------------------------------- 부친인 좌윤공이 1519년(중종. 14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故鄕)으로 귀향 하였다. 이때 공은 충청병마사(忠淸兵馬使)로 재직 중이었다. 휴가로 귀성(歸省)할 때는 많은 수레와 말을 마을 밖에 멈춰두고 사치(奢侈)하고 화려(華麗)한 거동(擧動)없이 간소한 차림으로 가정의 청검(淸儉)한 법도를 지켰다. 어릴 때 강신효(姜藎孝) 등과 더불어 동학(同學)하였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고 병가(兵家)의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이르기까지 통달(通達)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순탄한 벼슬살이 중 관직이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올랐으나 할아버지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청근(淸謹)함을 이어 실행(實行)하고 아버지 좌윤공(左尹公)의 검소(儉素)한 가풍을 준수하여 항상 이르기를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 효도함은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큰 기량(器量)은 당시 어진 선비들의 추허(推許)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충재(沖齋) 권벌(權橃),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 참의(參議) 장대훈(張大訓), 종형(從兄)인 판결공(判決公) 적(績) 등과 더불어 사이가 좋았으며 언제나 응천(凝川)에서 서로 술회(述懷)하면서 즐겼다. 공은 52세에 아버지 좌윤공(左尹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그 슬픔은 예도(禮度)를 지났으며 상장(喪葬)의 절차는 예법(禮法)에 어긋나지 않았었다. 무덤 앞에 기둥 같은 돌을 다듬어 세우고 글을 지어 새기니 “정성 모아 비나이다. 어진이 와 군자는 스스로 반성할줄 압니다. 산과 바다에 맹서(盟誓)하노니 여기가 농토나 목장이 되지 않게 하여 영원히 추모의 정 지킬 것이며 , “산신령(山神靈)과 지신(地神)에 축원합니다. 애지중지 이 무덤을 천추만세(千秋萬歲)토록 풍우(風雨)의 피해 없이 영원히 사모(思慕)의 정 이뤄지게 하소서.”하였다. 이 글을 좌우(左右) 돌기둥에 나누어 새겼으니 어버이를 사모(思慕)하는 효심의 지극함을 이로써도 가히 엿볼 수 있다. 명종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세상에 실의(失意)를 느낀 공이 여러 벗들과 이별(離別)하면서 말하기를 “삼조(三朝)의 임금을 섬겨 벼슬이 장군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내 또 무엇을 바라랴?”하고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정자를 북계 위편의 신동에 지으니 수석(水石)의 경개가 아름다운 곳 이었다. 손수 세 그루의 나무를 심어 삼수정(三樹亭)이라 이름 하고 그 사이를 산책하면서 노년을 위한 장신의 휴게소로 삼아 유유히 자적하였다. 초배(初配)는, 전의(全義) 이(李)씨 판사 세분(世芬)의 딸이며 후배(後配)는, 여흥(驪興) 민(閔)씨 진사 희전(希銓)의 딸이다. 묘소는, 함안 원복동 점동 아버지묘 아래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