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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도(趙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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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소헌(大笑軒)공 조 종 도(趙 宗 道).1537(중종.32) ~ 1597(선조.30)
- 조선조중기의문신
- 자(字)는 백유(伯由)
- 자호를 대소헌(大笑軒)
- 어계선생의 오세손
- 1558년 (명종.13)에 생원시에 합격
- 1573년(선조.6) 안기도 찰방을 제수
- 장예원 사
<상세보기>
대소헌(大笑軒)공 조 종 도 (趙 宗 道).1537(중종.32) ~ 1597(선조.30)
조선조중기의문신. 자(字)는 백유(伯由)요 자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하였으며 어계선생의 오세손이요 참봉공 언(堰)의 장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용모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8세에 시문을 완성할 정도였으며 달팽이 시는 많이 회자되었다. 9살적에 은군자였던 정두(鄭斗)선생께서 글을 배웠으며 15살 때에는 지방시에 선발되었다.
학문은 조남명 식(曺南冥 植) 노옥계 진(盧玉溪 )양선생의 문하에서 청문(請文)하였으며 또한 이퇴계(李退溪)선생의 문하에서 강론하여 성리학에 밝았으며 제자백가서 등은 한번 보기만 해도 기억하는 재주로 통달했으며 문장 또한 도도하였다.
명종13년(1558)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73년(선조.6)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제수 받았다. 재직 중 유서애 성룡(柳西崖 成龍) 김학봉 성일(金鶴峰 誠一) 등 여러 현사들과 교의가 두터웠었다. 그 후 장예원 사평(掌禮院 司評)을 지내고 양지(陽智) 현감을 배명 받았으며 1587년에 금구(金溝)현령으로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그곳에 현존해 있다.
1592년(선조.25)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제수 받고 이어 단성현감으로 전임1596년(선조.29)에 함양군수를 배영 받았음.
1592년(선조 .25) 봄에 공이 서울에 들렀다가 얼마 후 임진란이 발발한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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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식 [ 曺植 ,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 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2) 노진 [ 盧 , 1518~1578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 풍천(豊川). 자 자응(子膺). 호 옥계(玉溪) ·칙(則庵). 시호 문효(文孝).
3) 성일 [ 金誠一 , 1538~1593 ]조선 중기의 정치가 ·학자.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임란의 의병장
4) 양지(陽智) ;지금의경기도 용인(龍仁)
5) 금구(金溝);지금의 전북 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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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암 로(李松巖魯)와 함께 정승이었던 유서애(柳西崖)선생을 찾아본 후 돌아오는 길에 이로(李魯)와 약속하기를 “창의(倡義)에 앞장서서 통문(通文)을 내어 모병토적(募兵討賊)하기로 하고, 만일 일이 여의치 않으면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으면 놈들의 욕(辱)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하니
이로(李魯)가 말하기를 “누구와 같이 죽을 것인가?”하고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다른 사람은 불가(不可)하지만 정덕원(鄭德遠), 김지해(金志海), 박덕응(朴德凝) 등은 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할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마침 김학봉 성일(金鶴峰 誠一)이 초유사(招諭使)로 함양으로 내려왔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어 학봉(鶴峰)은 용기백배한 듯 반기면서 그들을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였다.(東儒師友錄중에서)
김학봉(金鶴峰)이 공을 의령군의 임시 군수로 발령하였다. 공이 도착해본 즉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군 행정을 수행하고 있어 공은 그에게 직분을 넘겨주고 함양으로 돌아왔다.
김학봉(金鶴峰)을 보고 말하기를 "소문에 의하면 서울과 평양이 모두 함락되고 몽진(蒙塵) 길에 오른 왕의 행차는 이미 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니 나라는 이제 망했다” 하고는 강물을 굽어보고 투신 자결하려 하니 학봉은 그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옳지 못하다. 소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헛되게 죽는다면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저 강물에 맹서 하노니 내가 죽기 두려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요” 하니 공이 수긍하였다. 그때 학봉은 다음과 같은 시(詩) 한수를 읊었다.
"촉석루 중의 셋 장사, 술 한 잔 손에 들고 남강을 가리키네. 도도히 흐르는 저 강물아, 물결 끊이지 않은 한 혼백 죽지 않으리!"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그때 왕은 의주로 행행(行幸)하였다. 공에게 의병의 공(功)으로 첨정(僉正)의 관직이 상(賞) 주어졌다.(神道碑중에서)
1596년(선조. 29)에 함양군수에 취임하였다. 1597년(선조.30)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 방면을 침입해 왔다. 공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청(請)하여 일군(一郡) 병민(兵民)을 산하(傘下)에 소속시켜 죽음으로써 항전(抗戰)하기로 하고, 병민(兵民)을 거느리고 험악한 지대(地帶)를 점거(占據) 사수하였다. 그러던 중에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라는 명(命)을 받고 안의현감 곽준(郭)과 함께 성루(城壘)를 보완하고 작전(作戰)을 꾀하던 차에 공이 함양으로 체임(遞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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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로 [ 李魯 , 1544~159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자 여유(汝唯). 호 송암(松巖). 시호 정의(貞義). 경상도 의령 출생으로 조식(曺植)에게서 배웠다.
2) 초유사(招諭使):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3) 체찰사(體察使):조선 시대에, 지방에 군란(軍亂)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그곳에 가서 일반 군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 보통 재상이 겸임하였다.
4) 이원익 [ 李元翼 ,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 전주. 자 공려(公勵). 호 오리(悟里).시호 문충(文忠).
5) 황석산성 [ 黃石山城 ]경남 함양군 서하면(西下面) 봉전리(鳳田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6) 곽준 [ 郭 , 1550~159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현풍(玄風). 자 양정(養靜). 호 존재(存齋). 시호충렬(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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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하기를 “수성(守成)은 위험하고 또 관수(官守)도 없으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이미 죽음으로서 국가(國家)를 지키고자 맹세하였고, 적(敵)이 이미 육박(肉迫)하였는데 의리상(義理上) 떠날 수 없다.”고 하니 자제(子弟)들이 처음에는 빨리 길을 떠나려고 하다가 공의 의(義)로운 말을 듣고 모두가 뒤를 따랐다.
주장(主將) 백사림(白士霖)은 "성(城)이 높고 험준(險峻)하니 적(敵)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더니 적(敵)이 성(城)에 박도(迫到)하자 밤에 몰래 성을 헐고 달아나 버려 성이 함락되었다.
곽준(郭)이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하겠소.”하고 물으매, 공(公)이 답하기를 "죽을 따름이다."하고 곧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서향재배(西向再拜)하고 곽준(郭)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서원(書院)은 함안(咸安) 덕암(德巖)에 있고, 충렬사(忠烈祠)는 안의에 있으며 황암(黃巖)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일찍이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지킬 때 적의 선봉이 척후(斥候)를 보낼 즈음, 학유(學諭) 윤선(尹銑), 진사(進士) 박천우(朴天佑)와 같이 밤에 술을 마시다가 분개(憤慨)한 시구는 그의 지조의 본바탕을 여실히 나타냈다 하겠다.
공동산(崆峒山) 밖에 사는 것이 비록 즐거우나.
순(巡), 원(遠) 성중(城中)에서 죽는 것 또한 영화(榮華)롭네.
崆峒山外生雖樂. 巡遠城中死亦榮.
(海東名臣錄중에시)
일본에서 보낸 사신 현소(玄蘇)의 오만불손한 기질을 고쳐놓은 시 또한 호탕 무비하다.
"종도는 이름이요 자는 백유이다, 술이 깼어도 걱정 없고 취했어도 근심 않네.
때때로 무지개 같은 곧은 기 토하면, 그 빛살 끝없이 뻗어 모든 별 가리네.“
宗道其名字伯由, 醒無思慮醉無愁. 有時吐氣虹霓直, 萬丈光輝翳斗牛.
공은 총명(聰明)하여 제자백가설(諸子百家說)을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記憶)하였고, 문장(文章)이 도도(滔滔)하여 애써 다듬으려는 뜻이 없었다.
공의 모습은 크고 뛰어나 언론에 구애 받지 않았고, 분발(奮發)하면 뇌성(雷聲)처럼 엄숙(嚴肅)하여 좌중(座中)에 바람이 일면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여 들어야 했기에 사람들이 공을 꺼렸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한잔 마시면 크게 웃었고, 주석(酒席)이 파(罷)하지 않으면 웃음 또한 그치지 않았음으로 호(號)를 대소(大笑)라고 하였다. (遺事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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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임(遞任):벼슬을 교체함
2) 관수(官守):관리로서 맡은 직책.
3) 공동산(崆峒山):중국 의 산명 황제(黃帝)가 광성자에게 문도(問道)한 곳
4) 순(巡)원(遠):당나라 장순(張巡), 허원(許遠)을 말한다.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자 장순(張巡)은 허원(許遠)과 같이 저양(雎陽)을 지켰는데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군량(軍糧)이 떨어지자 애첩(愛妾)을 죽여 군사를 먹였다. 성이 함락되어 반군에게 잡혀 죽었다.
5) 겐소 [ 玄蘇(현소) , ?~1612 ]일본의 승려·사신. 국적 : 일본 활동분야 : 승려, 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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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장인 판서 이준민(李俊民)은 조남명 선생의 생질이었다. 항상 주위 사람들에 이야기하기를 “우리 조선에 인물이 많지 않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한 연유는 공을 사위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동강(東岡) 김문정공 우옹(金文貞公宇顒)이 만시(輓詩)로써 곡(哭)한 글에,“영남(嶺南)의 사표(師表)인 당당(堂堂)한 벗, 마음은 웅대(雄大)하고 기(氣) 또한 호협(豪俠)했네..왕촉(王)이 죽음 듣고 놀라,(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을 비유함)사첩산(謝疊山:인명)은 즐거이 은거했네
열렬한 정의심(正義心)은 인륜의 기강(紀綱)을 부지했고,
영걸(英傑)스런 풍채는 지금의 조정에서 으뜸이었네.
평생토록 웃고 이야기할 곳(죽어 묻힐곳), 강은 넓고 하늘은 높푸르구려!
嶺表堂堂友, 心雄氣亦豪. 驚聞王死, 肯作疊山逃.
義烈扶人紀, 英風壯本朝. 平生談笑處, 江闊碧天高.
세인(世人)은 이 구절로 공의 기상(氣象)을 잘 묘사(描寫)하였다고 말한다.
(師友錄중에서)
전(傳)에 이르기를, 조종도(趙宗道)의 자(字)는 백유(伯由)며 함안 인이다. 사람됨이 걸림이 없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품위 있는 익살스런 농담을 잘하였으며, 항상 말할 때는 많이 웃는다고 하여 자호(自號)를 대소자(大笑子)라 했다. 밖으로 보기에는 약간 방탕 한 듯 하면서도 안으로는 소신이 확립되어 주관 없이 남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일찍 추천(推薦)으로 안기찰방이 되어 나와 사귀게 되었으며 매우 친히 지냈다. 임기가 만료되자 양지현감에 승진(陞進)되었고 재임(在任)중에 치적(治績)이 많아 여러 현(縣)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어떤 사유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歸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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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민(李俊民);1524~1590.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 자수; 호; 신암; 본관; 전의.40여년의 관직을 청렴결백하게 지냈다.
2) 김우옹 [ 金宇顒 , 1540~160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본관 의성(義城). 자 숙부(肅夫). 호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 조식(曺植)의 문인.
3) 왕촉(王):연장낙의(燕將樂毅)가 제(齊)나라를 파(破)하고 왕촉(王)이 현(賢)함을 듣고 청(請)하니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4) 첩산집(疊山集):사방득(謝枋得) 자는 군직(君直). 호는 첩산(疊山). 장시성(江西省)사람. 문절(文節)선생이라고도 한다. 원군(元軍)의 침공을 받았으므로, 그는 송조(宋朝)의 회복에 필사적으로 획책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으로 망명하였다. 뒷날 원조(元朝)의 부름을 받고 억지로 베이징(北京)으로 끌려갔으나, 두 조정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고 단식(斷食)하여 죽었다. 문집 첩산집(疊山集) 16권과, 저서에 문장궤범(文章軌範) 7권이 있다. 문장궤범은 당송(唐宋)의 명문(名文)을 수록한 것으로, 문장을 배우는 사람의 입문서로 널리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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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후에는 기축역옥(己丑逆獄)를 겪었다. 백유(伯由)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제보(提報)로 체포되어 옥(獄)에 갇히고 고문(拷問)을 받다가 혐의가 풀려 방면되었다. 공이 체포되자 사람들은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고 하여 친구(親舊)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餞送)하는데 백유(伯由)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왜란이 극심(極甚)할 때 안의현감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병(病)으로 사임하였고, 또 함양군수로 임용 되었으나 또 병(病)으로 물러났다. 선조 30년(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모든 고을이 바람소리만 듣고서도 분궤(奔潰)하여 한 사람도 성(城)을 지키는 자(者)가 없었다.
오직 안의현감 곽준(郭)이 홀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수축(修築)하여 이민(吏民)을 이끌고 고수(固守)하고자 하니 백유(伯由)가 말하기를 “내 대부(大夫)의 뒤를 쫓아서 비록 관수(官守)의 책임(責任)은 없으나 도망하는 무리와 같이 풀 숲 속에서 썩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면 마땅히 명백(明白)하게 죽을 것이다.”하고 곽준(郭)과 함께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남문(南門)을 지켰으며 왜적(倭賊)과 싸운 지 하루 만에 성(城)이 무너지고 적이 입성하매 백유(伯由)와 곽준(郭)은 같이 해(害)를 입었다.
백유(伯由)의 처(妻) 이씨(李氏)는 고(故) 판서(判書) 준민(俊民)의 딸로 또한 함께 죽었다. 아들 영한(英漢)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년 만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그의 부친의 체골(體骨)을 성중에서 찾아 장사(葬事)하고 난 뒤 수일 만에 상복(喪服)입은 지친 모습으로 나를 하회리(河回里) 집에 찾아와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비통(悲痛)했다.
오호(嗚呼)라! 사람은 진실로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죽을 곳을 얻는 것은 극히 어렵지만 백유(伯由)는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백유(伯由)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나만은 홀로 평생에 백유(伯由)의 마음을 믿고 그 열렬(烈烈)한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을 알고 있었다. 이제 절개를 평생 고치지 않음을 이와 같이 이뤘으니 “매서운 바람 앞에 굳센 풀을 알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忠臣)을 안다.”고하는 것이 진실로 이를 이름이다 하였다.
(西崖 유성룡(柳成龍) 찬(撰))
배(配)는, 정부인(貞夫人)전의(全義)이(李)씨로 판서(判書)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의 딸로서 공과 같이 황석산성에 있었다. 성이 함락되자 두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조씨(趙氏)가문을 대를 끊어지게 할 수 는 없느니라. 나는 의리상 떠날 수 없다.”하고 공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대소헌집 한권이 세전(世傳)한다.
증직(贈職)은,자헌대부이조판서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吏曹判書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이며,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묘소는,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건좌이며 정부인(貞夫人) 전의(全義) 李씨와 합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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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여립(鄭汝立 :1546~1589):본관 동래(東萊). 자(字)는 인백(仁伯). 전주 출생. 경사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였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하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반란을 이르켜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으며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