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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趙榮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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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백(嶺伯)공 조 영 복(趙榮福), 1672(현종.13)~1728(영조.4)
- 조선조 중기의 문신
- 자(字)는 석오(錫五)
- 호는 이지당(二知堂)
- 1705년(숙종.31)생원시에 합격
- 1708년(숙종.34)에 전설사별검(典設寺別檢)을 제수
- 1710년(숙종.36)에 의금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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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嶺伯)공 조 영 복(趙榮福),1672(현종.13)~1728(영조.4)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字)는 석오(錫五)요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며 의도(毅道)의 증손이요 해(楷)의 아들이다. 1705년(숙종.31)생원시에 합격하여 1708년(숙종.34)에 전설사별검(典設寺別檢)을 제수 받고 1710년(숙종.36)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김 전성서주부(典性署主簿)로 승진하고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긴 후 1712년(숙종.년에 김천군수(金泉郡守)를 발령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그해 겨울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에 임명, 그해 10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715년(숙종.41)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716년(숙종.42)에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제수받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감. 그 해 가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들어가 겨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음. 1717년(숙종.43)정유년에 사간원헌납(司諫院 獻納)에 승진하고 명을 받아 호남을 시찰. 그해 가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제수 받았으며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하고 1718년(숙종.44)겨울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배명 받았음. 1719년(숙종45)년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병,형조참지(兵刑曹參知)를 지냄. 그해 겨울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음. 1720년(숙종.46)가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음. 그 후 공조참의(工曹參議) 사간원 대사관(司諫院大司諫)을 지냄. 1723년(경종.3) 봄에 선산(善山)에 귀양갔으며 그해 겨울 영춘(永春)으로 옮겨졌으며 경종(景宗) 을사년 봄에 사면 받고 그 해 여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고,1726년(영조.2)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배명 받고 승지(承旨)로서 가승대부(嘉善大夫)에 승계하였음.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도총부 부총감 동지의금부사(都摠府 副摠管 同知義禁府事)에 배명 후 도승지(都承旨)로 임명. 개성부유수(開成府留守)에 전임 그해 겨울에 파직.얼마 후 사면 받음. 1728년(영조.4)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배명 받고 그해 4월 23일에 졸하니 형년이 57이었다. 어릴 때부터 기개와 도량이 뛰어나니 백부인 교리공(校理公)이 몹시 기특하게 여기면서 그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반드시 우리 집안을 크게 빛낼 것이다 하였으며. 신정아(申晸雅)공이 평소에 인물을 감상 할줄 아는 분이라 하여 파서공을 교외에서 뵈웠을 때에 공을 보고 몹시 기애(奇愛)하면서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극구 친찬 하였다. 학문과 예술이 일찍 성숙하여 십오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농암 김창협(金昌協)공이 시험관이었으며 합격자 발표장에 조부인 파서공(坡西公)이 내림(來臨) 하였더니 김공은 그를 배알(拜謁)하고 다시 그 답안지를 읽으면서 크게 칭찬하였으며 이로부터 태학에 드나들면서 문장으로 모든 동료들을 압도하였다. 급제한 날 여러 재상들이 정청에 모인 자리에서 답안지를 보고 우수한 인재를 뽑았다고 서로 축하하였다. 지평(持平)으로 재직 중 왕자인 연령군(延齡君)이 사저(私邸)를 호화스럽게 건축하고 있는 것을 보고 상소하기를 "근래 민간에서는 주택의 사치한 것을 숭상하니 실로 큰 병폐가 옵니다. 전하께서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을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야 옳을 줄 아오며 반듯이 낭비는 막아야 합니다." 하였더니 왕은 가납 하여 경비를 절약하라 하고 누차에 걸쳐 점검하였다. 무술년에 공이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직 중 조정에서 일본국으로 사신을 보내려고 할 때 일본에서는 역관(譯官) 두 명과 인삼(人蔘)의 무역에 관한 결정서를 조목 별로 보내줄 것을 청구해 왔다. 공은 새로운 예(例)를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대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끝내 허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왜인들은 더욱 더 교만해져 거기에 따른 증거문서를 요구해오니, 공은 "만약 그 문서를 발급해 준다면 이는 자신의 결정이 아니요 상대방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어떨지요? 하고 아뢰었더니 숙종은 옳다하고 한결 공의 말대로 하니 왜인이 순종하였다. 역관 일행이 떠난 후 공은 신병으로 사직하여 돌아 왔다. 왜인은 곧 말하기를 계약서가 없으면 필연 다른 사건이 발생 할 것이요 하니, 조정에서는 결국 그들의 강요를 이기지 못했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대단히 한스러운 일이라 했으며 이로써 공의 인물됨이 세인의 외경(畏敬)하는 대상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이 경상관찰사(慶尙觀察司)로 재직시 창의궁(彰義宮)의 아전이 백성이 잡은 고래의 눈알을 빼앗으려다가 얻지 못한일이 있었다. 왕은 그 지방의 관리를 벌하고 세금감동관을 귀양살이를 보내기도 하였다. 공은 상소문을 올려 옛 날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불가함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반복하여 아뢰었다. 왕은 그 보석을 부셔 없애라 명을 내리고 누차 불만스런 기색을 표현하니, 공 또한 불안하게 여겨 그 직을 사퇴했다. 승정원(承政院)에 재직 시 왕이 어느 날 밤에 거동하여 명하기를 신료들은 모두 입시하여 시를 지으라 하였다. 주관 하는 자의 다음 에 공은 자리 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왕은 모직물과 말안장을 하사 하였으며 또 측근의 신에게는 4 6조 형태의 문이나 격에 구애됨이 없는 사율시를 지으라고 명했는데,공은 그 자리에서 상등에 뽑혀 사슴의 가죽을 하사 받았었다. 그 후 공이 입시하여 어전에서 간하기를 "근일에 출제하여 시를 짓게 명한 사안은 태평성대의 기상이라 하겠으나 초가에서 곤궁하게 사는 백성이 적지 않음에 그들을 위하여 은전(恩典)을 베풀어야할 시기임에도 시와 글을 지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너무나 한가한 놀이에 불과하며 나라 다스리는데 무슨 효용이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옳은 의견이다"하고 받아들였다.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결원이 되어 비변사(備邊司)에서 올린 임명 추천품의서(推薦稟議書)에 세 사람 중 끝으로 공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품신(稟申)하였더니 다음 날 공이 입시 후 퇴궐(退闕)하려는 차에 왕이 내시를 시켜 종이를 한 장 전하니 공이 공손히 받아본 즉 송도 유수(松都留守)의 내신서 였는데 공의 성명 위에 낙점(落點)하여 직접 친히 주니 다른 사람에 비하면 특별한 은총이었다. 영면(永眠)하기 한해 앞인 정미년에 관직을 물러나고 충주(忠州)로 내려와 집 한 채 마련하여 생활하면서 "자손이 현명하고 재산이 많으면 그 의지를 손상 시키고 어리석으면 과실을 더하게 된다.”는 한나라 선제(宣帝) 시절의 학자 소광(疏廣)의 말을 인용하여 이지당(二知堂)이라 옥호를 짓고 우아하게 노닐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이인좌(李麟佐)의 란에 공은 지름길로 서울로 들어 가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제수 받았다. 난이 평정 후 다시 환고(還故)하면서 미리 써놓았던 상소문은 그 어조가 매우 통절 하였다. 상소를 올리기 전에 등창이 나서 집에서 종명(終命)하니 부음(訃音)을 들은 왕은 매우 슬퍼하고 부의와 제물을 내리도록 전교(傳敎)하였다. 공은 늦게야 귀위(貴位)에 올라 부모를 봉양 못한 것을 통절히 생각하여 항시 눈물이 뺌을 젖셨다. 봉선(奉先)에 더욱 정성을 다 하였고. 원대(遠代)의 묘소를 수비 치장(竪碑治粧)하고 어계선생의 조묘(祧廟)를 종손의 생활이 어려웠기에 자기 힘으로 수리하고 사당을 세웠으며 또 위토전(位土田)도 마련하였다. 형제 자매간에 우애 했으며 특허 생질(甥姪)을 후대(厚待)하였다. 자씨(氏)가 타계하자 좋은 무덤자리가 없다기에 자기의 신후지(身後地)를 주웠으며 동생이 가난하여 돌아 갈 곳이 없어 집과 논밭을 사 줘 살게 하였고 동기간 여럿이 이웃 하여 살았다. 종족 간에는 가깝고 먼 구분 없이 화목하여 소홀함이 없었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司)로 재직시 함안(咸安)에서 종족들을 모와 놓고 연회를 베풀고 기쁜 정을 나누니 듣는 자 모두가 감탄하였다. 제반 사무에 정통하고 총명이 남달랐다. 호조에 재직시 노련한 관원들도 감히 기망 스러은 행사는 하지 못했다. 행정은 관대히 했으며 법률은 조문의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정상을 참작 적용하니 관원과 백성들이 애정 스럽게 대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서예(書藝)도 뛰어나 일가견이 있었으며 필원(筆苑)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며, 증직(贈職)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손이사, 지경영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총관이다.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孫貳師,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摠管)이다. 초배(初配)는, 함양 (咸陽)여(呂)시 부정 필총(必寵)의 딸이요 후배(後配)는, 영일 (迎日)정(鄭)씨 참봉 찬헌(讚獻)의 딸이요 삼배(三配)는, 김해 (金海)김(金)씨 부호군 세(世)의 딸이다. 묘소는, 아버지묘아래 유좌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