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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회(趙重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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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충헌(忠憲)공 조 중 회(趙重晦),1711(숙종.37)~1782(정조.6)
- 조선 후기의 문신
- 자(字)는 익장(益章)
- 호는 독락제(獨樂齋)
-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 어계선생의 10세손
- 1736년(영조.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등제
- 가주서(假注書)를 제
<상세보기>
충헌(忠憲)공 조 중 회(趙重晦), 1711(숙종.37)~1782(정조.6)
조선 후기의 문신. 자(字)는 익장(益章)이요 호는 독락제(獨樂齋)이며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요 어계선생의 10세손이며, 유수공 영복(榮福)의 아들이다.
일찍이 도암(陶庵) 이재(李縡)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736년(영조.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등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제수 받고 1739년 설서(說書)가 되고, 1743년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왕의 사묘(私廟)의 참례(參禮)의 부당함을 논박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748년 대신들이 경연석상에서 상주(上奏)하여 부수찬(副修撰)에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수찬(修撰)을 거쳐 이듬해 헌납(獻納)·겸사서(兼司書)·문학(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750년 탕평책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 파직 당하였으나 곧 복직되어 이듬해 겸필선(兼弼善)이 되고, 이어서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2년 필선(弼善)이 되고,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지를 역임한 뒤 1757년 대사간이 되고 1759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 뒤 승지·병조참의·영변부사·양주목사 등을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때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뒤주에 갇혀 아사(餓死)하게 되자, 이의 부당함을 극간하다가 무장(茂長)으로 유배되었다.
1770년 개성유수, 이듬해 우윤·도승지를 역임하였다. 그 뒤1772년 이조참판, 이듬해 대사헌·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며 1775년 이조판서에 이어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정조의 즉위와 함께 함경도관찰사를 배명했으며,1779년(정조 3) 공조판서로 옮겼다. 이듬해 치사(致仕)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1781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2년에 졸하니 형수 73이었다.
이해 어계(漁溪)선생의 충절을 소진(疏陳)하여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공의 천성은 온후(溫厚) 진중하며 깔끔하였다. 가정에서도 순수하고 돈독했으며 항상 말은 성(誠)과 경(敬)으로 했으며 조정에서는 명성을 위해 엄하게 하지 않았으며 심상(尋常)을 쫒고 조심했다. 사리를 분별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일은 반드시 이루었다.(墓誌에서)
공은 모든 일을 처리함이 한결 정도로서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명확히 하였으며 셋 조정에 봉직하면서 곧은 도리로써 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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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로소(耆老所):기로소(耆老所):정식 명칭은 치사(致仕)기로소. 왕 및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다.
2) 봉조하(奉朝賀):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이다. 종신토록 신분에 맞는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다만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에만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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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진노하는 경우에도 보통 사람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주저 없이 하였으나 그 행적은 위태하고 마음은 괴로웠다. 그러나 깊고 고요한 그 심중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이는 곧 성대하다 않을 수 없다.(行狀에서)
도암선생은 매양 공을 나라를 다스릴만한 기량(器量)이 있는 인물이라 하였다. 공이 시강원의 설서에 재직 중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대를 이을 맏이를 교육시키는 방법은 반드시 몽양(蒙養) 을 중히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東宮)의 나이가 다섯 살인데 마땅히 많은 관원을 접하여 일찍부터 공부를 논에 물을 대듯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수년 후에 갑작스럽게 학업을 시작하여 강의 한다 해도 노는데 익숙해져 톱 이가 어긋나듯 막히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하였다.
계해년에 정언(正言)에 재직중 소를 올려 종묘의 수개축(修改築)건을 논의하면서 "종묘의 수리나 개축은 봄과 가을의 중순에 시행하는 것이 예(例)임에도 금년 가을에는 어떤 사유로 9월 보름 후에 이르러서야 시작하는지요? 상하가 편안함을 좋아하여 그로 인해 국사를 나태하게 한다면 장차 세금을 걷어드릴 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하였다.
또 사묘(私廟)(영조의 생모를 모신 사당)에 가는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종묘에 전배(展拜) '공손히 절함'의 중요함은 법으로 제정되어 있으며 지금 사묘(私廟)에 사정(私情)으로 갑작스럽게 행차하여 제사를 올린다면 반드시 삼헌 할 것인즉 예법에 맞지를 않습니다. 임금은 하늘에 제사 지내거나 능묘에 성묘하는 경우 외는 궁을 떠나 유숙해서는 아니 되며 사정(私情)으로 제례(祭禮)를 무시하는 것은 선대의 법도를 어기는 것입니다."하였다.
또 중국 심양에서 온 사신을 돌려보내는 사안에 대하여 말하기를 백 년 동안을 선물을 바쳤으나 와신상담(臥薪嘗膽)한 많은 임금의 뜻이나 지하에서 원통히 잠든 지사(志士)들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례(前例)를 벗어나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낸다면 그들은 득의 양양 할 것이니. 세교(世敎)는 무너지고 삼백년 예의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 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니 통탄하는 바이라 하니 왕이 진노하여 6일 동안을 정사를 보지 않으니 공은 18일이나 석고대죄 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도 도암 이재선생 만은 혼자 말하기를 "직언한 것이니 죽지 않는다." 했다. 과연 수일 후에 풀려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비록 은거는 했으나 곧다는 명성은 조야를 진동시켰다.(洪直弼의 신도비명중에서)
임오년(1762) 여름에 왕세자(사도세자)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났었다. 공은 승지로 재직 중이었다.관을 벗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부터 세자가 임금에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 하드래도 어찌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겠습니까? 신은 만 번이라도 죽겠나이다하니 왕이 진노하여 흑산도로 귀양 보냈었다. 얼마 후 돌아온 공은 또다시 세손이 사가에 출입하는 일에 대하여 쟁의를 하니 왕은 비록 허락지 안했으나 내심으론 기뻐하였다. 또 명하기를 받은 전교를 그 자리에서 읽어보라 했더니 공이 가만히 선채 읽지 않으니 왕은 심히 화를 내어 준엄하게 꾸짖었다. 공은 오열하면서 14년을 왕을 모시면서 듣지 않은 말이 없었으니 다만 빨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니 선유(宣諭:백성에게 임금의 훈유)를 받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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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양(蒙養):겉으로는 어석은 체 하면서 속으로는 정도(正道)를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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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에 승지로 입시했다. 왕이 측근에게 말하기를 어느 해 조모(중회)의 상주한 글이 지금도 기록되어 있으니 일을 곧게 처리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게 한 자는 이 사람이 가장 으뜸이었다.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당시 뜰을 메운 많은 신들이 증기에 찐 곡식처럼 입을 연 자가 한사람도 없는 중에 유독 조종회는 진언 했으니 만약 이러한 자가 한사람만 더 있었다면 저 지경에 이르지는 안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다 했으며 뒷날 간신(諫臣)에게 말하기를 옛말의 모진 바람 앞에 굳센 풀을 알고 난세에 충신을 인식하다 하더니 오늘날의 조중회를 두고 한 말이로다 하였다.
1770년(영조.44)에 개성유수로 임명되었다. 왕은 교지에 이르기를 깊은 밤에 매양 그대와 전임자 찬성공을 생각하니 즉 신축년 나의 세자 책봉시에 붓을 들어 선유(宣諭)를 쓴 그가 부임했었으며 휴식을 겸 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공은 그 뒤를 이어 받아 선정을 베푸니 고을 안이 은혜스럽게 했다.(墓誌銘에서)
1776년에 함경도의 관찰사로 배명 받았다. 홍계희(洪啓禧)가 조정에 청원하기를 자신은 도암(陶庵) 이재(李縡)선생과 같은 학통을 이어 받았다하여 도암선생과 함깨 향사를 받겠다고 하였다. 공은 이 부당성을 글로써 올려 맹렬히 통박하여 실현되지 못하게 윤허를 받은 것은 실로 통쾌한 사건이라 하였다.(墓誌銘에서)
을미년에 특별히 이조참판을 제수하였더니 공이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왕이 답하기를 "경의 충직함과 때가 시끄럽다는 것은 한결 아는 바이다."하였고 부임한지 수개월 만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왕이 측근에게 이르기를 중회는 오직 본심만 지녔다 하였으며 매양 공을 보게 되면 의관을 정제하여 만났으니 그 예우함이 이와 같았다.(家狀에서)
45년간의 관직생활을 기록한 입조일기(入朝日記)가 현존하며 당시의 역사참고문헌으로 활용 되고 있다.
배(配)는, 정경부인 전주(全州) 이(李)씨 좌의정 관명(觀命)의 딸이다. 여자로써의 덕과 행실을 갖추었었다.
계해년의 상소사건으로 왕의 진로를 사 구금되었을 떼 조야가 필연코 공은 살지 못할 것이다 했으나 부인은 놀라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아들 조카들에게 온화한 모습으로 타일렀다. 그리고는 북을 향하여 울면서 간절하게 기원하기를 "성명(聖明)이 위에서 부군(夫君)의 충의심을 한결 밝게 비춰주소서"하니 모두가 감복했다.(夫人의 墓誌銘에서)
묘소는, 죽산 삭영산 고치동 곤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