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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감(趙 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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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옥천(玉川)공 조 감(趙堪), 1530(중종.25)~1586(선조.19)
- 조선초기의 명사
- 자(字)는 극기(克己)
- 호는 옥천(玉川)
- 어계선생의 현손
- 1570(선조 .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으로 선임
- 을유년에 종부시주부(宗簿
<상세보기>
옥천(玉川)공 조 감(趙堪), 1530(중종.25)~1586(선조.19)
조선초기의 명사. 자(字)는 극기(克己)요 호는 옥천(玉川)이다. 어계선생의 현손이며, 희빈당 정견(庭堅)과 진주 하씨 (晋州河氏)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상의 공덕으로 장수찰방(長水察訪)에 특채되었으며, 1570년(선조.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사포서별좌(司圃署 別坐) 의금부도사 (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으며 1585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승계하였다, 증직(贈職)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이다.
우계 성혼(牛溪成渾)선생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이르기를 "조(趙)군 극기(克己)가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내 애통(哀慟)히 곡하노니 오호라! 영전에서 내 어찌 무어라고 슬픔을 표해야 할까? 내 나이 17세적에 백인걸(白仁傑)선생의 문하생이 되었을 때 군(君)은 그 집의 사위로써 함께 수학하고 있었는데 그가 어진 선비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충후하고 너그러운 인품에 반하여 술에 취한 듯 하였다.그리하여 서로가 40여년을 친히 새겼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군(君)은 호화스럽게 비단 옷을 입고 살아 궁색함을 아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가난한 집에 장가들어 초가수간에 풍우조차 온전히 가루지 못하는 거처에서 조촐한 소식(蔬食)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먹었을 뿐 아니라 그런 기미는 추호도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같은 학당에서 공부하면서 매양 그의 고매한 도량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고 또한 이모가 타계한 후 계실로 들어온 부인이 이모의 소유인 전답과 노비들을 돌려주려 하지 않자 어머니에게 권의학기를 노비 27명과 전토 9석지기 가운데 택일 하도록 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율곡 선생의 아버지 되는 분이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하였다 한다.
공의 덕성스러움은, 효도하고 우애하여 믿음 있고 돈후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위중한 역량으로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결했으며, 재물은 탐내지 않고 의리를 중히 하고, 친척을 사랑으로 돌보고, 혼인을 시켰으며, 남방의 재산을 제때 옮기지 못해 재정이 어려운 일가 몇 사람에게 임시로 돈을 빌려주기는 하였으나 회수 여부는 살피지 않았다.
(碑銘중에서)
군(君)의 병세가 위중하여 운명의 때가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려서도 문병 온 손님과 평상시와 같은 담소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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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포서별좌 [ 司圃署別坐 ]궁중의 채소전과 園圃(원포)를 관장하던 곳으로 개국초에 설치하였다. 1466년(세조 12) 沈藏庫(침장고)도 병합하였으며 종6품직의 관원
2) 종부시 [ 宗簿寺 ]왕실의 보첩(譜牒)을 맡아보던 관
3) 성혼 [ 成渾 ,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 : 昌寧)호 : 우계(牛溪)·묵암(默庵)
별칭 : 자 호원(浩源) 시호 문간(文簡)출생지 : 서울 순화방(順和坊)주요저서 :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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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불러 유언을 남길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붓으로 써서 성문화하여 훗날의 징표로 삼아야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자식은 기록이 없다손 하드라도 아비의 명은 그대로 지킬 것이다" 하고 옆에 있던 종제를 돌아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점(占)이 꼭 맞는듯 하다"하니 그가 먼저 금년의 운기가 좋지 못 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 이었다. 일찍이 김해어씨(金海魚氏)인 생질녀를 집에서 양육하여 장차 서울에 사는 일가 집에 시집을 보내려 계획했다가 "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유한이다"하였고 사위를 불러 친지에게 연락을 취하여 함께 초상의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부녀자들이 울부짖으니 공이 개유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니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내 이미 늙은 몸이라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하고서는 부녀자를 물러가게 하고 태연히 눈을 감았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만시(輓詩)에 이르기를 "백인걸(白仁傑) 성혼(成渾)두 선생의 연고로 의지하며 새김이 깊었네. 노경에 이르러 서로의 정 더욱 두터워 나의 과오 엄히 깨우쳤네." 또 이르기를 "들으니 천년의 유택지 산수경개 아름다운 곳이 라네. 영(嬴),박(博)같은 타향에 묻힌것보다 낫고 또한 율곡(栗谷)과 묘소등 날 같이 했음에랴"하였다.
白老溪翁故 因之托契深 晩來情更厚 吾過子能箴
聞說千年宅 山重水復奇 愈勝葬嬴慱 況與栗翁隨
공은 어려서 영남의 정두(鄭斗)와 정지생(鄭之甥) 김태현(金台鉉)과 같이 글을 배웠다.그들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하기가 힘겨운 것을 본 공은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의 경제적 도움을 제공 했었다. 그들이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부음을 들은 공은 머슴 50인에게 3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여 장사를 치르게 도왔으니 진주 사람은 지금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咸州誌에서)
공이 찰방(察訪)으로 재직 하였을 때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이웃 고을의 조세로 수납한 곡식의 수송을 감시 감독하고 있었는데 호령이 명확히 엄숙하고 또한 지적사항이 법을 어기지 않아 아전들이 일사불란하게 임무를 수행 하여 감히 문란하거나 소란함이 없으니 백성들이 기꺼이 일을 도와 기간 내에 수송을 마쳤다.(墓碣銘에서)
공이 당산(棠山)에 거주 시 과거시험 합격자의 발표문에 사위인 성문준(成文濬)의 명단이 들어 있음을 보았다. 이날 창랑(滄浪:성문준의호)은 우계에서 돌아와 공을 뵙느라 합격여부는 보지 못했었다. 옹서(翁壻)간에 종일 이야기하면서도 과거의 이야기는 언급하지 안했었는데 창랑(滄浪)이 돌아가려고 뜰에 내려서자 공은 비로소 그에게 “시험에 합격 했다네” 이르니 창랑(滄浪)은 "저는 이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하니 옛날의 선배들이 과거시험의 합격여부에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음을 이로써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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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철 [ 鄭澈 ,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본관 : 迎日(영일)호 : 松江(송강)별칭 : 자 季涵(계함), 시호 文淸(문청)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關東別曲(관동별곡)),《思美人曲(사미인곡)
2) 찰방 [ 察訪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
3) 옹서(翁壻) 장인과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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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는, 수원(水原) 백(白)씨 우참찬 인걸(仁傑)선생의 딸이다. 휴암(休庵:백인걸 의호)이 을사사화(乙巳史禍)를 마났을 때 부인은 열다섯 살이었다. 인품을 평가하는 능력을 가추고 있었는데 사악(邪惡)함은 정도(正道)를 해치는 것이니 사악함을 원수로 생각하여 "선비는 마땅히 사악함을 물리쳐야한다"하니 듣는 자 모두가 혼을 뺐긴 듯 놀라워하였다. 사람들이 휴암(休庵)은 딸을 잘 뒀다고 칭송하고 맹단(孟慱)의 어머니와 비교하여 어떠냐고 하였다.
(宋時烈송시열)선생이 지은 令人墓表(영인묘표)중에서)
공이 진주에 있을 때 어떤 여인에게 잠시 마음을 두었었다. 어느 날 그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공을 사택으로 찾아 왔었다 공은 사과하고 그를 돌려보냈는데 이를 안 부인은 사람을 시켜 뒤 좇아 그를 데리고 오게 하여 공을 위해 주위의 청소나 잔일들을 맡아 보게 하면서 공을 섬기게 하고 어른에게 아뢰어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게 하였으니 당시의 세정 속에서 흖지 않은 일 이었다.
(墓表(묘표)중에서)
부인은 어려서부터 소학과 많은 책을 읽었으며 그 중 경전(經典)을 익히 배워 문리가 통달했었으니. 이 모두가 휴암(休庵)의 가법(家法)에 기인 한 것이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수원(水原) 백(白)씨 우참찬 인걸(仁傑)의 딸이며, 묘소는, 경기도 파주의 아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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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사사화 [ 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