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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일(趙 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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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평시서령 (平市署令)공 조 일(趙 鎰), 1578(선조.12)~1647(인조.25)
- 조선중기의 문인이며 명관
- 자(字)는 자중(子重)
- 호는 오담(鰲潭) 또는 평봉자(萍蓬子)
- 어계선생의 육대손이요 참판공 의도(毅道)의 삼남
- 1618(광해군.11)에 진사시(進士試)에
<상세보기>
평시서령 (平市署令)공 조 일(趙 鎰), 1578(선조.12)~1647(인조.25)
조선중기의 문인이며 명관. 자(字)는 자중(子重)이며 호는 오담(鰲潭) 또는 평봉자(萍蓬子)이다. 어계선생의 육대손이요 참판공 의도(毅道)의 삼남이다.
1618년(광해군.11)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1626(인조.4)에 특별히 추천을 받아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을 제수 받았으며 정묘호란때 어가(御駕)를 강화도(江華島)까지 호종 (扈從)했으며 이후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와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연천현령(漣川縣令)을 발령 받았으나 취임 안 했으며 후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장예원 사평(掌隸院司評)과 평시서령(平市署令) 등을 지냈다. 정해년(1647) 2월 25일에 졸하니 향년이 70이었다
공이 15세 적에 임진란을 만나 성우계(成牛溪) 선생을 따라 피난길에 올라 의주까지 가게 되었었는데 그 혼란한 속에서도 학업을 계속했으니 우계선생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行狀(행장)에)
광해군 때에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이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 양 선생을 문묘(文廟)에서 퇴출 하려 했을 때 공이 많은 선비들을 이끌어 솔선하여 그 불가함을 여러 번 상소하여 소명(疏明) 하였더니 그 문장이 늠름하여 유생의 사기를 앙양케 하였다. 만약 공의 학문이 정대(正大)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 같은 현실이 가능 했을까? 하였다.(李文簡 喜朝(이문간 희조)공이 쓴 碑記(비기)중에서)
광해군의 어지러운 조정에서는 윤리 도덕의 기강이 무너지고 상실되어 일반적 상식이 날로 점점 악화되니 공은 분통함과 얄미운 생각을 참지 못하여 꺼려하고 거슬리는 언사(言辭)를 많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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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자시 [ 內資寺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등)과 직조(織造) 및 내연(內宴) 등을 맡은 관청.
2) 선공감 [ 繕工監 ]조선시대 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봄
3) 상의원 [ 尙衣院 ]조선시대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財貨)·금·보화 등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
4) 시서 [ 平市署 ]조선시대 市廛(시전)과 度量衡(도량형) ·物價(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청
5) 정인홍 [鄭仁弘,1535~1623]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瑞山(서산)(瑞山) 호:내암(萊菴) 자;덕원(德遠),활동분야: 정치 출생지:경남 陜川(합천).
6) 이언적 [李彦迪,1491~155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驪州(여주) 호:晦齋(회재)·자계옹(紫溪翁 본명:적(迪) 자;복고(復古), 시호 文元(문원) 주요저서:《구인록《大學章句補遺(대학장구보유)) 주요작품 : <일강십목소>
7) 문묘 [ 文廟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의 薛聰(설총) 崔致遠(최치원) 고려조의 安裕(안유유) 鄭夢周(정몽주) 조선조의 金宏弼(김굉필) 鄭汝昌(정여창) 李彦迪(이언적) 趙光祖(조광조) 金麟厚(김인후) 李滉(이황) 李珥(이이) 成渾(성혼) 趙憲(조헌) 金長生(김장생) 宋時烈(송시열) 宋浚吉(송준길) 金集(김집) 朴世采(박세채) 등 18분이 배향 되고 있으며 유학자로서 가장 영광스런 명예이다.
8) 이희조 [ 李喜朝 , 1655~1724 ]조선 후기의 문신 ·유학자. 본관 : 延安(연안) 호 : 芝村(지촌) ·艮菴(간암) 자 同甫(동보), 시호 文簡(문간) 활동분야 :정치, 문학 주요저서:《芝村集(지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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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강수(姜燧)가 이웃에 살면서 위세당당하게 기염을 토하니 공은 면전에서 그 악한 점을 가차 없이 배척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무척 위험스럽다 했다 . 수(燧)가 언로(言路)를 맡은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사건으로 공의 집 노복을 가두고 “결딴을 내 버리겠다 하였다” 화(禍)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 할 수 없는 즈음에 공은 가족을 이끌고 파산(坡山)에 돌아와 이때부터 성안의 발길을 끊었다.(行狀(행장)에서)
태학관이 인조반정 후 과격한 연소한 무리들의 논의에 혼탁한 양상이 되었었다. 공이 당시 태학관의 관리임무를 맡아 매사를 공평히 처리하니 그로 말미 아마 차츰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行狀(행장)에서)
감찰 직에 있을 때 당해 관서의 예스런 분위기가 떨어진지가 오래되어 공이 개연히 복고(復古)의 뜻을 품고 있었다 한 문관의 출신이 부정하였으나 그가 대간(臺諫)이 됨에 물의가 비등하였다. 이 때 공이 동료 중에서 가장 먼저 제의하기를 “ 종부시(宗簿寺)가 어찌 그냥 있을 것인가? 이를 보고만 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다”하고 그 대관(臺官)이 처음 부임하는 자리에서 모두가 약속아래 직입부동 하여 그를 맞이하지 않으니 그는 곧 물러갔다. 식자(識者) 간에 훌륭한 일을 하였다 했었다,
(行狀(행장)과 尹舜擧(윤순거)가 쓴 碑銘(비명)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도보로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학사 이시직(李時稷)을 만나 왕이 이미 강화도로 피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이공과 함께 결빙(結氷)한 강을 건너 양천(陽川)땅에 도달하니 왕은 또 다시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고 들었다 . 발길을 돌려 선릉(宣陵)에 도착하니 적병이 들을 덮어 성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되돌아 강릉(江陵)으로 향하는 도중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 듣고는 피난중의 사대부들과 함께 서러 마주보고 통곡하였다.
그 후 서울에 들러 위문을 마치고 상주(尙州)로 옮겨 사니 그곳의 산수 경개가 좋아 꽃과 대를 심고 독서를 하면서 스스로 즐겨 보냈다. 일찍 말하기를 “하루를 평안히 지낸다면 하루의 복이 되노라”하였다.
총명함이 뛰어났었다. 고금의 서적들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일단 본 것은 치세(治世)와 난세(亂世) 성공(成功)과 실패(失敗) 인물의 평가 등 모두를 기억할 수 있었다. 평생에 초고(草稿)한 문적이 4~50권이 되었으나 글자가 정연(整然)하며 한번도 글자를 잘 못 쓴 적이 없었다. 붓을 들면 즉석에서 시(詩)를 엮을 만큼 조예(造詣)가 깊었다. 부드럽고 결백하여 또한 단정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평봉집(萍蓬集 )두 권이 본가(本家)에 소장되어 있다.(行狀(행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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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간 [ 臺諫 ]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임무를 가진 臺官(대관)과 국왕을 諫諍(간쟁) 封駁(봉박)하는 임무를 가진 諫官(간관)을 합쳐 부른 말.司憲府(사헌부)의 大司憲(대사헌)에서 持平(지평)까지의 官名(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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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풍수설에 쫓겨 선영(先塋) 멀리 장사하는 사례가 허다하나 나는 이를 찬성하지 않으니 내가 죽거든 부모의 묘 옆에 매장하여 혼백도 천추만세에 서로가 의지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行狀(행장)에서)
증직(贈職)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이며
초배(初配)는, 연안 (延安)김(金)씨 도사 경(璥)의 딸이요
후배(後配)는, 양천 (陽川)허(許)씨 증 승지 호(昊)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아가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