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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원(趙逢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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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파서(坡西)공 조 봉 원(趙逢源), 1608(선조.41)~1691(숙종.17)
- 조선조 중기의 문관
- 자(字)는 사달(士達)
- 호는 파서(坡西)요 참판공 의도(毅道)의 손자요
평봉자(萍蓬子) 일(鎰)의 아들
- 1678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첨지중추부사
<상세보기>
파서(坡西)공 조 봉 원(趙逢源), 1608(선조.41)~1691(숙종.17)
조선조 중기의 문관 학자. 자(字)는 사달(士達)이며 호는 파서(坡西)요 참판공 의도(毅道)의 손자요 평봉자 일(鎰)의 아들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1658년(효종.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이듬해 다시 교관(敎官) 제수(除授) 1662년(현종.3)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통례원(通禮院) 인의 겸 한성참군(引儀兼漢城參軍)에 승급, 가을에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를 제수 받고 겨울에 고령(高靈)현감 배명(拜命). 1666년(현종.7)에 체임(遞任) 1667년(현종.8)에 장예원(掌隸院)사평(司評).겨울에 임파(臨坡)현령 제수(除授) 1669년(현종.10)에 체임(遞任).되어 1671년(현종.12)에 의빈도사(儀賓都事) 한성(漢城)판관(判官)에 임명. 겨울에 고양(高陽)군수 1675년(숙종.1)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 왔다. 1676년(숙종.2)에 안산(安山)군수로 발령 받았으나 사퇴했으며 무오1678년(숙종.4) 봄에 시종(侍從)으로서 나이가 70이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하였고 첨지(僉知)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제수 받았다. 1687년(숙종.13) 봄에 문곡(文谷) 김상국(金相國)이 경연석상(經筵席上)에서 왕에게 아뢰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격하고 동지(同知) 중추부사(中樞府使)를 배명 받았다.1691년(숙종.17) 2월30일에 졸하니 향수(享壽) 84이었다 .
선생의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은 돈후하고 재능과 도량은 가지런하고 발랐다. 평소 꾸밈이 없어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친한 사이라 해도 감히 의(義) 아닌 것은 청탁 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화평스럽고 공경히 대했으나 오직 어떤 시시비비의 논쟁이 있을 때는 확연히 판단하는 까닭에 그 주장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갈명(碣銘)중에서)
공은 일찍부터 과거시험에 응시 할 수 있게 추천을 받았으나 이(利)롭지 못하다 하여 응하지 않고 선현(先賢)의 학문 연찬에 뜻을 두고 깊이 경전을 익힘과 동시에 실천하기를 전력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서로 학문을 연마하는 인사는 모두가 유림(儒林)과 훌륭한 선비였다.
효종(孝宗) 초에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선생이 이조판서 직에 재직 중 공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임용코자 하였으나 선생께서 선 듯 승낙하지 않았더니 우암(尤庵)은 서신을 보내 독촉하기를 "임금의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불구자라 하더라도 원기를 내어 성주(聖主)를 도와야할 뜻을 가져야 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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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몽훈도 [ 童蒙訓導 ]조선 전기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郡縣(군현)에 둔 관직
2) 활인원별제 [ 活人院 別提 ] [조선시대의 진휼청(賑恤廳)종6품
3) 통례원 [通禮院 [ 조선시대 국가의 儀式(의식)을 맡아보던 관청
4) 의빈부도사 [ 儀賓府都事 ]조선시대 국왕이나 왕세자의 駙馬(부마)를 관리하는 관청의종7품
5) 송시열 [ 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老論(노론)의 領袖(영수). 본관 : 恩津(은진)호 : 尤庵(우암)·華陽洞主(화양동주) 자 英甫(영보)), 시호 文正(문정) 주요저서 : 《宋子大全(송자대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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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르는 것은 벼슬하여 녹(祿)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요. 존형(尊兄)같은 이가 서울에 있어야 만이 중대한 국사를 논의 할 수 있을 것이니 단지 한 가지 관직에 끝이는 것이 아니다"였다. 또 말하기를 "성주(聖主)의 목마름과 같은 정성이 한걸 쓸쓸해져서 세상을 깊이 근심 하는 자의 애석함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하였다.
(行狀(행장)과碣銘(갈명)중에서)
선생이 교관으로 재직 중 옷깃을 여미고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인사가 적지 않았으며 ,그 중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과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형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선생은 스승이었기에 자식도 가르칠 수 있었으나 아들인 근(根)을 우암(尤庵)선생에게 부탁하여 도야(陶冶)하게 하였다. 교리공이 급제 후 처음으로 관로에 오를 때 “제반사를 조급하게 다루지 말 것이며 얌전하고 겸손한 자를 도와야한다”는 것을 첫째의 실천조목으로 삼게 하였다. 교리공의 천성적인 강직한 바탕으로 정의로써 조정에 종사한 까닭에 형벌이나 귀양사리 같은 고초를 받아도 소신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이러한 근원이 없었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 했을까? 글을 배우고 문하에 출입한 많은 선비들이 그의 훈도 아래 연마하고 수련하여 빛나는 명사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성대한 업적이냐? 만약 태학의 스승으로서 이처럼 인재를 양성했다면 교육의 효과가 이 정도로 끝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슬프기도 하고나 그 점이 한스럽구나, 나 창흡(昌翕)은 어려서 두 형의 뒤를 따라 한 모퉁이에서 덕망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안석에 기대 앉아 회초리를 치니 모든 학생이 숙연히 서릿발이 내린 듯 공손히 두려워했었다 .장성하여 두 형께서 선생을 흠모하고 있음을 항시 보아온 바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복을 입고 곡하며 심히 애통하였다 그러면서 은혜로운 교훈의 풍류가 길게 뻗어 있음을 그윽하게 느꼈다.(碣銘(갈명)중에서)
선생은 맑고 우아하며 또한 검소하였다. 일찍 교리공이 털가죽 옷 한 벌을 생신 기념으로 구해 올렸더니 선생께서는 좋지 못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 어찌 거친 옷 입기를 부끄러워했더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나를 이렇게 하여 더럽혀서야 되겠느냐?"하였다.
고령(高靈)현감 으로 재직 시 저습지에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우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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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창집 [ 金昌集 , 1648~1722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 : 안동호 : 夢窩(몽와) 자 여성, 시호 충헌
주요저서 : 《國朝自警篇(국조자경편)》 《五倫全備諺解(오륜전비언해)》《夢窩集(몽와집)
2) 김창협 [ 金昌協 , 1651~1708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 안동 호 : 農巖(농암) ·삼주 자 중화,시호 간주요저서 : 《農巖集(농암집)》《農巖雜誌(농암잡지)》《朱子大全箚疑問目(주자대전차의문목)》《江都忠烈錄(강도충렬록)》주요작품 : 《文正公李端相碑(문정공이단상비)》 《監司李萬雄碑(감사이만웅비)》金崇謙表(김숭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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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전임자가 하지 못한 수리사업을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수로를 개통시켜 약 30만평의 논을 관개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게 하니 주민이 그 제방을 조제(趙堤)라 이름 하여 영원토록 그 공을 잊지 않게 하였다.(行狀(행장)에서)
임파(臨坡)현령 재직 시에는 그 지방의 풍습이 누추하고 학문 또한 뒤졌었다. 선생은 고을 안에서 우수한 인사를 선출하여 향교에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의무교육제도 처럼 공부를 시켰더니 차차 풍속과 교화가 개선되어 예조의 인선에 뽑혀 태학관에 들어간 사람이 많아져 그 곳 사람들이 이곳이 바로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인 추로(鄒魯)라고 자랑하였다.
여러 고을의 정사에 임하면서 맡은 일들이 상부와 모순 되고 차질이 생기면 그 직에 연연하지 않았던 선생이었기에 만기를 채운 경우가 많지 않았다. 고양(高陽)군수 시절 을묘사화(乙卯士禍)의 참상(慘狀)을 보고 즉시 사직하여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갔다. 담장도 무너진 초라한 집에서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려웠으나 평안하게 마음은 여유가 만만하였다.
성품이 천륜(天倫)에 돈독하였으며 기묘(己卯)년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당시 어버이 참판(參判)공 내외분이 건강히 살아 계셨으며 주위에서는 재취할 것을 권했으나, 선생은 동생과 매씨가 결혼하기 전에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 후 15년만인 계사(癸巳)년에야 계실(繼室)을 맞아 안살림을 마꼈다.
갑진년(1664)에 처음으로 함안조씨 숙원(宿願)의 대동보를 편찬 발간한 선생의 업적은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지고한 공로이다.
증직(贈職)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이며
초배(初配)는, 초계 (草溪)정(鄭)씨 판관 시혁(時赫)의 딸이요
후배(後配)는, 밀양 (密陽) 박(朴)씨사과 안선(安先)의 딸이다.
묘소는,경기도 파주군 아가산의 경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