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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근(趙 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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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손암(損庵)공 조 근(趙 根), 1631(인조.9)~1680(숙종.6)
- 조선조 중기의 문관
- 자(字)는 복형(復亨)
- 호는 손암(損庵)
- 파서선생 봉원(逢源)의 장자
- 1650년(효종.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 1664(현종. 5)에 제능 참봉(齊陵參奉)을 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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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보기>
손암(損庵)공 조 근(趙 根), 1631(인조.9)~1680(숙종.6)
조선조 중기의 문관.자(字)는 복형(復亨)이며,호는 손암(損菴)이요, 파서선생 봉원(逢源)의 아들이다.
1650년(효종.1)20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1664년(현종.5)에 제능참봉(齊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1665년(현종,6) 능(陵)의 수림 남벌(樹林濫伐)의 책임으로 상주(尙州)로 유배된 적이 있었으며 1666년(현종,7)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가 되고, 1668년(현종.9)에 추천으로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제수 받았다.
1669년(현종.10)가을에 한림(翰林)의 추천으로 부묘도감(祔廟圖監)감조관(監造官)에 임명 되었고 1670년(현종.11)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지낸 후 병조(兵曹)좌랑(佐郞)으로 전임(轉任)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제수 받은 후 시강원(侍講院)문학(文學)으로 옮겼으며 경상도(慶尙道) 경시관(京試官)에 파견 되고 1671년(현종.12)에 비변랑(備邊郞)이 되었다가 병조(兵曹)정랑(正郞)을 제수 받고 또 경상도(慶尙道) 경차관(京差官)에 파견되었다.
1672년(현종.13)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옮기고 사서(司書)를 배명 .전라도(全羅道)경시관(京試官) 에 파견되었다.
1674년(현종.15)에 홍문관 (弘文館)수찬(修撰) 교리(校理) 겸사서(兼司書)를 제수 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가을에 강서(江西)현령으로 나갔다가 1676년(숙종.2)에 임기만료로 체임하였다.
1677년(숙종.3)에 정평부사를 배명 받았으나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전라(全羅)도사(都事)를 배명 1678년(숙종.4) 봄에는 충청(忠淸)도사(都事)를 제수 받고 그 해 여름에 관직을 삭탈(削奪)당하였다.
1679년(숙종.5) 봄에 문초(問招) 후 경흥(慶興)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이듬 해 여름에 사면(赦免)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태어나면서 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오육세적에 소학을 통달했으며 아홉 살 적에 천연두(天然痘)를 앓았는데 마침 어른들이 집에 안 계셨다.스스로 약을 처방 조제 복용하여 효험을 보니 모두가 비범하다 하였다.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 )선생을 처음 배알했을 때 우암(尤庵)이 참으로 훌륭하고 나 세상에 보기 어려운 인재라고 찬탄하였다.
공이 독서를 좋아하여 관로에 나아가기 전에 서울을 왕래 하면서 말을 탄 채 대학(大學) 중용(中庸)등의 경서를 읽으면서 짧은 새끼줄로 만든 서산(書算)을 소매 속에 넣고 접고 펴기를 거듭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힘을 기울었으며 일찍이 말하기를 "이 책은 없어서는 아니 되는 책이라"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재주와 식견이 풍부하여 모든 사무를 능통이 처리하니 모두가 장래의 정승 감이라고 기대 했었으며, 공 또한 그러한 소망을 지녀 정치와 경제에 관한 많은 자료(조선 팔도의 호구수, 조세, 장병과, 군비, 전함의 수와 역사기록과 야사등) 를 수집하며 매산잡지(梅山雜誌)라는 책을 편집하여 완성하였었다.
문장은 순수한 이성(理性)을 주안 하여 정대하고 자세했으며 명백하고 세밀하여 조금도 화려하거나 괴이쩍음이 없었다. 이단하(李端夏)와 김석주(金錫胄)가 그의 글을 보고 세상에 널리 통하는 쉬운 글이라 평가하면서 훗날 대제학 감으로는 그를 견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했다.
문집은 본가에서 수장(收藏)하고 있다.
홍문관(弘文館)에 재직 시는 일개월도 못된 시일 안에 여섯 차례의 상소문을 올렸으며 사안에 따라 논의하는 과정에 기피하거나 숨김이 없었다.
현종 13년에 인선대비가 돌아가 궁중에서는 불교의식으로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재를 올리려 하였다. 공은 동료와 함께 상소하기를 "공자 말씀에 예로써 장사하고 또 제사를 지낸다면 효도와 선대 섬김의 도리는 다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외에 무엇을 얻고자 재를 지내려 하느냐?하였다.
공은 시류를 따라 명리만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조정과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무너뜨린다하여 그들을 과격하게 비난하여 그로인해 많은 분노를 샀다.숙종 기미년에 송상민(宋尙敏:복상문제로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음)의 옥사(獄事)가 야기되자 공도 여기에 관련되었다하여 그들은 몹시 좋아하면서,공에게 혹독한 형벌이 가해져 사형에 처해 질 것을 기대했으나 왕의 특명으로 멀리 함경도의 경흥(慶興)에 귀양 보내졌다.평소 신체가 허약하고 다병했던 공은 이로 인해 더욱 쇠약해져 사면 후 오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공의 의지는 청렴결백하여 일체의 영광스런 지위는 허심탄회 하게 사양하였으며,사관(史官)으로 추천 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공의 말씨는 온화하며 화락하고 쉬워 친하기가 용이했으나 불의함을 보면 바른말로 엄하게 책망하되 예리한 칼로 뼈를 찌르듯 하니, 모두가 친밀하게 대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모든 언론시비의 판단은 공정하고 성실하여 믿음이 두터워 친구 간에 추앙 받았었다.
평남의 강서현(江西縣)에 재직 중 주민의 습속이 야비하고 상제(喪祭)의 예도(禮度)를 몰랐다. 공이 가례(家禮)와 상례 비요(喪禮備要) 등의 책 중에서 알기 쉬운 부분을 해석하여 가리켰다. 경흥(慶興) 땅은 멀리 북방에 위치하여 주민들은 모두 말 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던 것을 보고 고을의 자제를 모아 공부시켜 유교학문을 알게 하였더니 공이 타계하자 그곳 주민들이 친족의 상사처럼 슬퍼하였으며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도보로 와서 조상하는 자 많았다.
증직(贈職)은, 통훈대부 홍문관 부제학(通訓大夫 弘文館 副提學)이다.
배(配)는, 영일(迎日)정(鄭)씨 성한(聖漢)의 딸이요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아가산 경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