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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숙(趙承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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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덕곡(德谷)공 조 승 숙(趙承肅)
- 자(字)는 경부(敬夫)
- 호는 덕곡(德谷)
- 두문동(杜門洞) 72현중의 한분
-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출생
- 1376(우왕. 2)에 진사 시험에 급제
- 정몽주(鄭夢周)선생의 문인으로 길재(吉再)와 친교
- 1377년(우왕 .3
<상세보기>
덕곡(德谷)공 조 승 숙(趙承肅)
자(字)는 경부(敬夫)요 호는 덕곡(德谷)이며 137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사년(1377) 문과에 급제하여 부여감무(夫餘監務)을 지냈다 조선의 태조가 고려 공양왕을 폐하고 국왕에 즉위한 1392년의 임신년 초에 선생이 부여감무에서 관직을 버리고 함양 덕곡에 돌아왔다.
일찍이 지은 시에 "삼 개월 동안 녹을 받지 못한 걱정 어찌 없겠느냐? 다만 명리(名利)만을 추구한 것 장지(葬地)에서 음식 빌어먹기 보다 더 부끄럽다오."(豈無三月無君嘆 只愧干名甚乞)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비 온 후에 쇠잔한 꽃이 물에 떠오르니 인간 어느 곳 무릉도원(武陵桃源) 아님이 없네."(雨後殘花浮水出 人間無處不桃源)하고 종신토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함양에 공을 모신 덕곡 서원이 있으며 성종조 때에 나라에서 제사 모시도록 하였는데 뇌계(礌溪) 유호인(兪好仁)이 지은 치제문(致祭文)에 말하기를 수양(首陽)명월(明月)이오 율리(栗里)청풍(淸風)이라 하고 또한 말하기를 금오(金烏)와 더불어 절의가 같으며 도연명(陶淵明)후 은사(隱士)로서 으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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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무 [ 監務 ]고려시대에 지방의 군·현(郡縣)에 파견한 관직
2) 삼월무군(三月無君);孟子集註(맹자집주)에 군자의 생계방도는 관직이 있어야 녹봉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실직을 의미한다.
(孟子集註藤文公篇(맹자집주등문공편)에서)
3) 걸번(乞):번간주육(間酒肉)의 준말로 남의 초상집에 가서 음식을 빌어 먹은 후 집에 돌아와서는 고관대작들의 접대를 받았느니라. 허세를 부려 아내를 울게 한 고사
(孟子集註離婁章(맹자집주이루장)에서)
4) 도원[ 桃源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곳이란 말로, 속세를 떠난 理想鄕(이상향)을 뜻함.
동진(東晉) 때의 시인 도잠(陶潛:자는 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5) 유호인 [ 兪好仁,1445~1494 ]본관.고령(高靈). 호 임계(林溪). 자 극기(克己). 시(詩) ·문(文) ·서(書)에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봉향되었다.
6) 율리 [ 栗里 ]도연명이 살던 곳.
7) 금오 (金烏); 야은 吉再와 매월당 金時習을 이름.
8) 도연명 [ 陶淵明 , 365~427 ]중국 동진(東晋) ·송대(宋代)의 시인 본명 : 도잠 자 연명 ·원량, 시호 정절선생 활동분야 : 문학 주요작품 :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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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정포은 몽주(鄭圃隱 夢周) 선생을 사사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세상일을 단절하고 오로지 후학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한 시대의 명유(名儒) 석학(碩學)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선생은 길야은(吉冶隱.再)과 사이가 좋았다. 시를 써 보내기를
"산 아래 물 맑은 곳 삶의 터전 이루니, 저녁달 아침안개 흥 더욱 넉넉하네. 서울 사는 옛 친구들 내 안부 묻거든, 죽림 깊은 곳에 누워 책과 벗한다 하여라.”하였다.
(負山臨水卜閑居.月夕煙朝興有餘.京洛故人如問我.竹林深處臥看書)
이웃에 혼사 치르는 집에서 혹 조복이나 의관을 빌리러 오면 선생이 "이것은 나의 옛날 조복(朝服) 이다. 참아 해지게 할 수는 없다."하며 지친이라도 빌려주지 않았다. 세상을 떠날 때 유명(遺命)에 따라 조복으로 염(殮)했다.
선생이 덕곡에 은거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일체 만나지 않았으며 옛 동료들이 면회를 청하면 칭병(稱病)하며 사절하였다. 혹 편지로써 안부를 물어 와도 회답하지 안했으니 사람들이 공의 생존 여부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일찍 저작랑(著作郞)직에 있을 때 명나라에 들어가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으니 소문이 중국 조야(朝野)에 널리 퍼졌다고 전(傳)한다.(墓表에서)
고향의 견불사(見佛寺)를 주제로 지은 시에
"명산속의 한 사찰, 태고 적 부터 있었네. 마루엔 한가한 세월이요 강당엔 신자들 줄을 이었네.생리(生理) 없는 네 모습 보며 신선을 배우지 못한 점 탄식 하네.담론 끝에 맑은 취향 있나니 얼씨구 좋은 운치 눈에 가득 하고나."
(寺在名山裡 開從太古前. 禪上閑日月 講席列人天. 聽爾無生理 嗟余不學仙. 談餘還有味 滿目好風煙)(東國輿地勝覽에서)
선생이 고향에 퇴거했을 때 나라에서 심향궤(沈香几)를 하사하였는데 거기에 새겨 졌던 명(銘)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성품의 강직함은 위(威)와 무(武)에도 굴하지 않으니 당나라의 위징(魏徵) 과 한나라의 급암(汲黯)같구나! 모두에게 귀감(龜鑑)이 될 수 있는 자 한 사람만으로도 사직(社稷)이 안정 된다하니 멀리 조정을 떠나 있더라도 나라 일을 잊지 말지어다"하였다.(邑誌에서)
고려가 멸망하자 부조현(不朝峴)에 올라 관복을 벗어 걸고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겠다는 맹서아래 심사를 표현하기를 "백이숙제의 절의심이 곧 나의 뜻이다"하였다.
함양의 지곡면 덕곡 서원에서 향사를 올리며 서원(書院)과 교수정(敎授亭)은 지방문화재이며 옆에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가 건립 되어있다.
세칭 두문동 72현의 한 분이다.
묘소는, 함양군 지곡면 신역전 뒷산 자좌이며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보성(寶城)선(宣)씨이며 묘는 합폄(合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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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은 吉再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본관 : 해평 호 : 야은 ·금오산인 : 시호 : 충절, 자 : 재보
출생지 : 구미 주요작품:《야은집》《야은속집》등
2) 저작랑(著作郞)중국 위나라 때, 문서의 초안을 맡아보던 벼슬
3) 어대 [ 魚袋 ]고려시대 백관의 공복(公服)에 착용하여 위계를 나타낸 물건. 공복은 4색으로1,2,3품은 자(紫) 4,5품은 비(緋) , 6 ·7품은 녹(綠), 8 ·9품은 청(靑) 등의 복색(服色)을 입게 하면서 자색을 입는 3품 이상은 금어(金魚)를 착용 하였다.
4) 부조현(不朝峴),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 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