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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욱(趙 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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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참지(參知)공 조 욱(趙 昱, 1432(세종.14)~미상(?)
- 자(字)는 자명(子明)
- 호(號)는 죽포(竹圃)
-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
- 1453년(단종1년)에 문과에 급제
- 문장이 능하여 관에 있을 때 많은 저작을 남김
- 관직은 안동부(安東府) 유학교수(儒學敎
<상세보기>
참지(參知)공 조 욱(趙 昱, 1432(세종.14)~미상(?)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다. 자(字)는 자명(子明)이며, 호(號)는 죽포(竹圃)이다. 고려조 말엽에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지낸 금은(琴隱)공 열(悅)의 둘째 아들로서 문과에 급제한 현감(顯監)공 영(寧)의 아들로 1432년에 출생하여 1449년 18세에 생원시험에 합격하고 약관 22세에 문장가로서 이름이 났으며 또한 145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안동부유학교수(安東府儒學敎授) 병조참지(兵曹參知)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어계선생께서 어느 날 호랑이 세 마리가 집 뒷산에서 북을 굴러 내리는 꿈을 꿨다. 이후 호랑이 호(虎)자를 따서 아들 삼 형제의 이름을 지었다. 종제인 참지(參知 昱)공에게 명하기를 "옛날 사람은 밥 그릇 세 번을 치는 동안 시(詩)를 지었다. 하니 내 또한 구리그릇을 세 번을 칠 것이니 그 동안에 뜻풀이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했더니 공은 응낙(應諾)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에 380어구(語句)가 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완성시키니 탄복하지 않은 이 없었다.(咸州誌(함주지)에서)
약설 하면 "세 아들의 이름을 지은 이의 성(姓)은 조(趙)씨이다.첫째는 동호(洞虎)니 맏이요 다음은 금호(金虎)니 버금이요 셋째는 야호(野虎)이니 끝이다. 어째서 끝을 야호 둘째는 금호 맏이를 동호라고 이름을 불렀으며 또 동(洞) 금(金) 야(野)는 어떤 뜻을 지녔는가? 무릇 호랑이는 산에 사는 동물이다. 산에서 바라보면 들은 멀고 마을은 가까우니 가까운 것이 장(長)이 되고 먼 것은 막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원근(遠近)처럼 선후(先後)를 따져 봐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금호를 말 한다면 종혁(從革)은 금(金) 이다 .대개 둘째 호(虎)는 동(洞)과 야(野)사이에 먼 들 보다는 먼저이니 막내 보다는 형이요 가까운 동(洞)보다는 뒤가 되니 아우가 되는 이것이 종혁(從革)인즉 둘째의 호(虎)됨은 호(虎)로서 금(金)인 것이다 .무릇 호(虎)로서 이름을 지어 비록 같은 호가 되었지만 실로 그 뜻은 전혀 다르다. 우렁찬 고함을 질러 산골이 찢어지는 듯한 호(虎)의 맹위(猛威)는 여기 삼호(三虎)가 아니며 .넘나 뛰고 소리 질러 백수(百獸)를 떨게 하는 호(虎)의 장(壯)함은 삼호(三虎)가 아니다 .복희(伏羲)씨가 지은 역서에 대인(大人)의 변(變)을 삼호에 비유(比喩)했고 당(唐)나라의 현인(賢人)들이 소인(小人)의 악(惡)을 삼호로 비해 경계하였고 주(周)나라의 소호(召虎)는 재상(宰相)으로서 호(虎)요 수(隋)나라의 한호(韓虎)는 장수(將帥)로서 호(虎)이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처럼 될 수 있고 겉은 호랑이 같으나 바탕은 양 같은 경우도 있으니 여기 삼호(三虎)는 소호(召虎)냐 한호(韓虎)냐 또는 양 같은가? 개 같은가? 이것은 곧 양육(養育)의 방식 에 달려 있다 하겠으며 삼호(三虎)의 기상은 실로 가장 우수한 호(虎)에서 근원 하여 장차 소도 잡아먹을 수 있는 바탕을 구비하였으니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지 않고 이름을 떨치는 호랑이가 될 것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름 지은이는 누구냐? 아버지 호랑이인 여(旅)요 글을 풀이 한자 누구냐? 아저씨 호랑이인 욱(昱)이다. 부호(父虎)가 없다면 자호(子虎) 있을 수 없으며 숙호(叔虎)가 없었다면 호설(虎說) 풀이 누가 했겠는가. 아!조호(趙虎)의 겨레가 성대하고 조호(趙虎)의 가풍(家風)이 떨칠 것인져."하니 발상과 표현의 위대함과 문장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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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혁(從革):五行(오행)에 金(금)은 성질이 견고하여 용도에 따라서 변한다. 書傳(서전)에 金曰(금왈)從革(종혁)이요 革者(혁자)는 從而又革也(종이우혁야)라 하니 때를 따라 변한다는 뜻
2) 변(變):易(역)의 大人(대인) 虎變(호변)은 학문이 높은 자는 사리를 밝게 나타냄이 호랑이의 무늬같이 빛나고 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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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당시의 대문장가인 김점필재 종직(金佔畢齋 宗直)선생과 친히 새겼으며 서로가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공이 안동교수직에 있을 때 점필재(佔畢齋)가 촉석루(矗石樓)를 주제로 하여 공에게 보낸 시 여섯 수가 있었는데 다섯째에 이르기를
"희고 붉게 차려 입은 두 선녀를, 학당의 재사가 어여뻐하네. 변함없는 그날 모습 아리따운 얼굴 ,향기로운 꿈 근래에 몇 번이나 꾸었는가?
(白白朱朱兩女仙 虞庠才子故應憐 依然當日春風面 香夢年來幾度圓)
여섯 번째에는 강물과 강가 꽃들 정이 깊어만 가는데 ,누대에 기댄 채 안동 땅에서 늙어만 간다네.
소(蘇)씨 娘子(낭자) 탄복했던 절묘한 문장은, 일찍 화려한 편지지 와 명필(名筆)로 널리 알져 있다오.
(江水江花還有情 倚樓人老永嘉城 蘇娘絶歎文章妙 曾見華牋彩筆鳴
공이 일찍 진주교수로 재직 중 추파를 던진 여인이 있어 향몽록(香夢錄)이란 글을 지웠다고 한다.(佔畢齋集(점필재집)에서)
공이 바둑을 잘 뒀는데 점필재(佔畢齋) 에게 응답한 시중에“이년동안 병영(兵營)에 노닐던 사람 그 누가 뜻을 얻지 못한 서생(書生)이라 하랴?. 멀리서 바둑돌 판에 놓는 소리 들리고 바람과 비 소소한데 밤은 벌써 새벽이네”라 하였다.
(二載傲遊驃騎營 誰言落魄一書生 遙知玉子閑敲處 風雨蕭蕭夜丙丁)
(佔畢齋集에서)
공은 또한 수리에 아주 밝았다고 한다.(國朝(국조)榜目(방목)에서)
병조참지(兵曹參知)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안동의 교수직을 오래 동안 봉직한 연유로 자손들이 그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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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호(召虎):주나라 宣王(선왕)때 사람 淮夷(회이)가 不服(불복)함으로 선왕이 召虎(소호)를 명하여 討平(토평)함
2) 한호(韓虎):수나라 擒虎(금호) 동한인으로 文帝(문제)때 노주총관이 되어 陳(진)의 平定(평정) 임무를 맡기니 輕騎(경기) 500명으로 陳後王(진후왕)를 잡았다.
3) 국조방목(國朝榜目):조선 태조 초기부터 1877년(고종 14)까지의 文科(문과) 급제자를 기록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