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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계(趙天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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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公遺域碑文 (1986.5.19. 竪碑)
陜川郡 妙山面 盤浦里 185-3(國道24호선 200m 趙山入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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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公遺域碑文 (1986.5.19. 竪碑)
陜川郡 妙山面 盤浦里 185-3(國道24호선 200m 趙山入口)
世代도 멀어졌고 兵難도 여러 번 지냈음으로 先生의 墳墓를 지키지 못 하였음은 免치 못할 어찌 할 수 없는 形便이었다. 或 그 地域은 譜諜에 傳해 오더라도 墳墓는 찾을 수 없는 境遇라면 오히려 그 地域에 나아가서 그 事蹟을 記錄하여 追慕함도 또한 마지 아니 할 것이니라. 이가 곧 咸安趙氏가 그의 先祖 版圖判書1)公의 遺域碑를 세우려하는 바이다.
1)版圖判書 : 高麗中葉의 官職으로 版圖司의 으뜸 벼슬, 31代 恭愍王11年(1362)에 戶部尙書를 고쳤다가 뒤에
戶曹典書로 고침, 朝鮮 太宗 때에 戶曹判書로 改稱.
公의 諱는 天啓요, 趙氏는 高麗元尹1) 鼎이 上祖가 된다. 公의 曾祖는 政堂文學2) 諱 烈이요, 祖는 密直司3) 三司左尹4) 諱 禧요, 考는 文科 鷄林府參軍5) 諱 之興이다. 公이 麗朝의 末運을 當하여 그 生卒 字號와 歷官의 자취가 失傳되었고, 다만 奉翊大夫6) 版圖判書의 官秩만이 譜諜에 記錄되어 있을 뿐이다. 公의 配位는 昌原黃氏니 司憲紏正君인 碩의 따님이시다. 二男을 두었는데 悅은 工曹典書7)요 忠은 開城 少尹8)이다. 典書가 四男을 生하였는데 彝는 神虎衛9) 精勇散員10)이요, 寧은 文科 縣監11)이요, 桓은 无后요, 安은 早卒하였는데 贈司僕寺正12)이다.
1)元尹 : 高麗 때 宗親과 勳臣의 爵號.
2)政堂文學 : 高麗 때 中書門下省에 屬한 從二品官.
3)密直司 :高麗 때 王命의 出納과 宮闕의 警護 軍事機密 擔當.
4)三司佐尹 :高麗 때 錢穀의 出納과 會計를 擔當히는 從三品官, 朝鮮時代 司憲府,, 司諫院, 弘文館.
5)鷄林府參軍 :高麗 때 開城府에 屬한 正七品官.
6)奉翊大夫 : 從二品 文散階.
7)工曹典書 : 工曹의 長官, 朝鮮 太宗 때 判書로 改稱.
8)少尹 : 高麗 때 從四品官, 朝鮮 때 漢城府 開城府 正四品官.
9)神虎衛 : 高麗, 朝鮮初期 國防을 擔當한 六衛의 하나(神虎衛, 左右衛, 興威衛, 金吾衛, 千牛衛, 監門衛)
10)精勇散員 : 高麗, 朝鮮初 六衛 中 神虎衛 精勇 二領에 屬한 正八品 武官.
11)縣監 : 從六品의 地方官.
12)司僕寺正 : 宮中의 乘輿, 馬匹, 牧場, 奴婢를 맡아보던 官廳의 正三品堂下官.
彝는 二男에 永愼은 錄事1)요, 次는 永錄이며, 寧의 男은 昱이니 號竹圃요 官이 兵曹參知2)요, 安의 男은 旅니 號漁溪요 諡貞節이니 世稱 莊陵 生六臣의 한 분이다. 忠은 三男을 두었는데 寶仁은 文科縣監이요, 種智는 司憲府 執義3)요 種勇이다. 寶仁의 男에 維秬는 及第요, 維己는 直長4)이요, 維文은 生員이며, 種智의 男은 呈金, 呈銀, 珩은 錄事니 餘는 不錄이라, 譜錄을 살펴보니 公의 以上 墳墓가 陜川 盤浦5)에 있었는데 住民들이 至今까지 그 山을 趙山이라고 한다.
1)錄事 : 高麗 때 九品官,
2)兵曹參知 : 兵曹의 正三品官, 六曹의 參議를 兵曹에서는 參知..
3)司憲府 執義 : 司憲府의 從三品官.
4)直長 : 正七品官.
5)盤浦 : 慶南 陜川郡 妙山面 盤浦里.
大槪 當時에 陜川에 살면서 그곳에 世葬하였다가, 그 後 他處로 移徙도 하고 世上이 搖亂해져서 오래 동안 守護치 못하여, 他人의 據有한바로 追想된다. 中世에 誌石의 露出로 因하여 公의 孫子 精勇散員公 彝의 墓가 盤浦 東麓에 있음을 찾았으나, 公.墓는 끝내 찾지 못하여 代代로 恨으로 넘겼는데, 이제 後孫들이 돌을 깎아 그 家世의 事蹟을 새겨 山 옆에 세워, 그 遺域을 表하여 後世에 보이려고 後孫 顯龍 性俊 光濟 等이 그의 世譜와 述事를 받들고 나에게 碑文을 請하니, 내 老衰하여 堪當키 어려워 삼가히 생각하니 趙氏始祖 元尹公이 張公 吉과 함께 唐나라로부터 東으로 와서, 우리 始祖 太師公1)과 諸公 七人이 兄弟를 맺어 麗朝를 同助하였고, 七賢祠2)에 幷享했다는 事實이 譜乘에 載在하니, 吾家와 趙氏와의 사이는 實로 異姓一家之誼가 있는지라, 어찌 辭讓하리요, 가만히 생각하니 公의 벼슬이 要職에 올랐으니, 朝廷에서 行한 事蹟이 반드시 赫赫可稱할 일이 많았을 텐데 史傳이 闕略되어 考證할 길 없으니 慨歎할 일이로다.
1)太師公 : 張吉, 高麗 때 王子, 駙馬, 妃父 等 宗室과 功臣 및 高位官員에게 내린 벼슬, 太師, 太傅, 太保를 三師.
2)七賢祠 : 安東에 七賢을 모신 祠堂.
살피건대 麗末에 主昏政亂하야 기울어지는 國運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로 알고, 沈晦以終함이 옛적 寧武와 같이 하였기로 世上에 알려지지 않았음이 아닌가? 오직 公의 아들 典書公이 麗末을 當하여 罔僕의 뜻을 품고, 洪晩隱 載와 李茅隱 午를 더불어 三嘉 杜尋山中에 遯跡하여 悲歌慷慨로서 나라 亡한 슬픔을 吐露하였고, 마침내 李公을 더불어 咸安에 歸隱하셨다.
三公을 雲衢書院1)에 幷享하니 그 淸風高節이 世上에 드러나게 되었음은 實로 公의 遺風餘敎에 起因됨이니, 公이 비록 一生을 沈晦하였으나 公의 心法의 傳함은 大槪 이에 있으니 “멀리 흐르는 물은 그 根源의 깊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이를 이름이 아닌가? 또 그 後 貞節公2)의 高意가 能히 前烈을 繼承해서, 簪組와 名行이 代代로 奕奕相承해서 國中에 箸聲함이 모두 公의 啓導가 아닌바 없는 즉 實로 根深枝茂의 理致에 附合됨이니, 公이 一家에 垂通됨이 크지 않는가? 이 盤浦의 山에 墳塋은 비록 可懲치 못하나 實로 托根發源한 곳이니, 後孫들의 無窮한 寓慕之所로 마련하려는 今日의 擧事가 道理에 마땅한 일이로다.
1)雲衢書院 : 琴隱 趙悅, 晩隱 洪載, 茅隱 李午 三公을 享祀하는 慶南陜川郡佳會面屯內里杜尋洞에 있는 書院.
2)貞節公 : 漁溪趙旅先生, 貞節은 諡號(淸白守曰貞好廉自克曰節:.淸白을 스스로 지킨 것을 貞이라하고 廉潔을
좋아 하며 스스로 이긴것을 節)
이어 銘하기를 “사람이 祖先있음은 나무가 뿌리 있음과 같나니, 가지의 蕃盛함은 뿌리의 튼튼함에 있도다. 뿌리가 튼튼치 않으면 어찌 그 잎이 茂盛하리오, 튼튼히 하는 方法은 뿌리깊이 培養함에 있으리라, 오직 版圖公께서 麗季를 當하여 벼슬은 비록 높았으나, 沈晦하여 抱負를 다시 試驗치 못하고 깊은 德을 내 몸에 쌓아서 後世에 끼쳤도다. 後孫이 克昌하여 聲猷를 大振하고 節義와 名行이 世世로 相承不替하니, 蔭德의 쌓임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 있으랴?
흐름을 따라 그 根源을 溯推하니, 可히 公의 遺澤을 짐작하리로다. 盤浦之山에 오래 동안 幽宅을 잃었으니, 墳墓는 비록 徵할 수 없으나 惟域은 可徵하리로다. 墓域을 因하여 祖先을 寓慕하면 可히 遺澤을 溯仰하리니, 이에 좋은 돌을 다듬어 그 事蹟을 昭載해서 길이 來世에 考證케 한다”
光復後 丙寅(1986年) 元春 權龍鉉 삼가 지음
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公遺域碑文 1986.5.19竪碑
陜川郡 妙山面 盤浦里 185-3(國道24호선 200m 趙山入口)
世代之遠而兵燹之累經先世丘壟之多墓之守勢之所難免而有無如之何矣其或地域之有傳於譜 而墳塋之莫尋者則猶將就其域紀其蹟以寓追慕是亦不可以已者也 此咸安趙氏爲其先祖版圖判書公遺域之所以樹也 公諱天啓趙氏以高麗元尹鼎爲祖而公之曾祖曰政堂文學烈 祖曰密直司三司左尹禧考曰文科鷄林府參軍之興公之世蓋當麗氏季其生卒之歲表德及歷官之蹟幷逸無傳只錄奉翊大夫版圖判書之官秩而已 公之配曰昌原黃氏父司憲紏正君碩 二男悅工曹典書忠開城少尹 典書四男彛神虎衛精勇散員寧文科縣監桓無后安早卒贈司僕寺正彛男永愼錄事永錄寧男昱號竹圃兵曹參知 安男旅號漁溪世稱莊陵生六臣之一諡貞節 忠三男寶仁文科縣監種智司憲府執義種勇寶仁男維秬及第維己直長維文生員種智男呈金呈銀珩錄事餘不錄按譜錄公及以上諸墓俱在陜川盤浦居人尙稱其山曰趙山云蓋其時嘗居于陜川而因以卜葬也 其後因遷徙世亂久失其守則山爲他人據有矣中間嘗因誌石之出得尋公之孫精勇散員彛之墓之在盤浦東麓者而公墓則終無推尋歷世以爲恨至是諸後孫始謀伐石竪于山側以表其舊阡之域而且記家世之蹟以示來後顯龍性俊光濟等奉其世譜與述事就余請其文余耄矣不堪而謹按趙氏始祖元尹公與張公吉自東來與吾權始祖太師公及諸公約爲兄弟者七人同助麗朝幷享七賢祠云者載在譜乘則吾家與趙氏實有異姓一家之誼而安能終辭竊惟公位登宰輔其立朝之蹟必有赫赫可稱者而史傳闕略無得以考者爲可慨也抑麗氏之末主昏政亂知不可以有爲故沈晦以終如寗武之愚而無得以稱者歟惟公之子典書公當麗運之訖懷罔僕之志與洪晩隱載李茅隱午遯跡三嘉杜尋山中悲歌慷慨以寓風泉之思卒與李公歸隱咸安俱享雲衢院其淸風高節爲世所稱者實由公之啓迪則公雖沈晦一生而心法之傳蓋有在矣見流知源公之可得者豈不在是耶且其後貞節公之高義克紹前烈而簪組名行奕世相承著聲國中者無非自公啓之則實合於晦根燁敷之理而公之爲一家垂統顧不大耶惟此盤浦之山雖丘壟之莫徵實爲托根發源之域則宜後人之寓追本之思於無窮而有今日之擧也 始終董役者後孫判石國魯也系以銘曰 人於祖先若根於木枝柯之繁由根而篤根之不蓄其發豈大蓄之惟何藏之於晦惟版圖公遭値麗季致位雖隆沈晦莫試蓄之於躬來後之遺厥後克昌大振聲猷節義名行相承不替非蓄之厚曷此之致治流溯源可想 厥德盤浦之山久失幽宅塋雖莫徵可徵惟域因域寓思可溯遺澤爰伐貞珉昭載厥蹟來者可考永世無斁.
光復後丙寅元春 花山 權龍鉉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