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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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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간송당공(澗松堂公) 조임도(趙任道)
간송당공파조(澗松堂公派祖)
[1585年(宣祖18乙酉)生()-1664年(顯宗5甲辰)
-자(字) : 덕용(德勇)
-호(號) : 간송당(澗松堂)
-증직(贈職) : 통선랑사헌부지평(通善郞司憲府持平)
-조선(朝鮮) 중기(中期) 문신(文臣)
<상세보기>
세계(世系)
始祖 鼎(大將軍元尹)→2代,幹(中郞將)→3代,丹碩(元尹)→4代,時雨(都領將)→5代,錫和(軍保郞)→6代,烈(正堂文學)→7代,禧(左尹)→8代,之興(參軍)→9代,天啓(版圖判書)→10代,悅(工曹典書)→11代,安(贈司僕寺正)→12代,旅(號漁溪生六臣貞節公)→13代,銅虎(珍山公贈參判)→14代,淵(耐軒公贈參議)→15代,庭彦(副司直公贈參判)→16代,埴→17代 任道
간송당 조임도의 학문과 사상(澗松堂 趙任道의 學文과 思想)
1.들어가는 말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時期)에 도(道)를 독실(篤實)하게 추구(追求)하고 실천(實踐)하려했던 학자(學者)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융화(融和) 노력(努力)
♦남명학(南冥學)의 영향(影響)이 다대(多大)한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활동(活動)했으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영향(影響)과 학맥(學脈)으로 보아 퇴계학파(退溪學派)로 분류(分類)
2.간송당 조임도의 생애와 학통(澗松堂 趙任道의 生涯와 學統)
♦임암공(임암공) 조식(조식)의 아들로 함안군(함안군) 검암리(검암리)에서 출생(出生)
♦남명문인(南冥門人)대소헌 조종도(大笑軒趙宗道:1587--1597)와는 10촌간(寸間)이다.
♦간송당(澗松堂)은 과거시험(科擧試驗)을 보기는 했지만 평생(平生) 동안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다.20歲 향시(鄕試) 합격(合格), 30歲 동당시(東堂試) 합격(合格), 32歲 회시(會試)에 뛰어난 등수(等數)에 있었지만 발표(發表) 명단(名單)에서 무슨 이유(理由)인지 설명(說明)없이 제외(除外)되어 이때부터 과거(科擧)를 포기(抛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천(薦)으로 공릉참봉(恭陵參奉), 대군사부(大郡師傅), 공조좌랑(工曹佐郞), 모두 칭병(稱病)불부(不赴)
♦정인홍(鄭仁弘) 퇴계(退溪) 문묘종사(文廟從祀) 반대(反對) 때 맹자(孟子) 방몽장을 인용(引用) 정인홍(鄭仁弘) 배척(排斥)
학맥(學脈)은 14歲에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에게 수학(受學)하였다. 반천은 경북(慶北) 봉화(奉化)에 살았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인(門人)이다. 조목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배향(配享)된 퇴계(退溪)의 수문인(首門人)이다.
16歲 때 안동(安東) 사는 퇴계문인(退溪門人)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에게서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17歲에 인동(仁洞)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만나 일생(一生)동안 스승으로 모셨다.
3.학문(學文)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심성(理氣心性)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같은 이론적(理論的) 전개(展開)보다는 주정(主情), 존성(存性), 거경(居敬), 궁리(窮理)라는 지행(知行)을 통(通)하여 수신(修身) 관통(貫通) 한다고 보았다. 즉 입지(立志), 양덕(養德), 조심(操心), 처사(處事)로 인격(人格) 수양(修養)을 해야 한다고 함.
학문(學文)의 창의적(創意的)인 학설(學說)을 용인하는 개방적(開放的) 태도(態度)라야 학문(學文)이 발전(發展)해 간다고 보았다.
학문(學文)이란 앎이 참되고 실천(實踐)이 실제적(實際的)이라야 함이며 기질(氣質)을 변화(變化)시켜 깨끗하게 오염(汚染)되지 아니함이 앎이라고 하였다.
4.여헌 사상과의 관계(旅軒 思想과의 관계(關係))
위의 사상(思想)은 스승인 여헌(旅軒)으로 부터 많은 영향(影響)을 받았다. 학통(學統)에 있어서는 퇴계(退溪)나 남명(南冥)과 간접적(間接的)으로 연결(連結)된 재전문인(再傳門人)이다.
실천주의(實踐主義) 경향(傾向)은 여헌(旅軒)의 영향(影響)이 결정적(決定的)이다. 간송당(澗松堂)은 여헌(旅軒)의 초세속적(超世俗的)인 자유정신(自由精神)과 풍류적(風流的) 기상(氣象)도 영향(影響)을 받았다. 초탈정신(超脫精神)과 호방(豪放)한 기상(氣象) 역시(亦是) 여헌풍(旅軒風)이다.
5.맺음 말
간송당(澗松堂)은 경상도(慶尙道) 함안(咸安)에서 태어나 남명(南冥)의 간접적(間接的)인 영향(影響)을 받았고 또 퇴계학파(退溪學派)에 속하는 반천 김증청과 두곡 고응척에게 수업(受業)을 받았기에 퇴계(退溪) 학통(學統)에 연결(連結)되지만 가장 결정적(決定的)인 영향(影響)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받았다. 간송당(澗松堂)은 여헌(旅軒)에게 학문적(學問的)으로 뿐만 아니라 인생(人生)에 있어 깊은 영향(影響)을 받았다.
학문(學文)과 사상(思想) 측면(側面)에서 간송당(澗松堂)은 일상(日常)에서 실천적(實踐的) 수양(修養)을 중시(重視)하고 마음의 입지(立志)와 외물(外物)에 원활(圓滑)하게 응대(應對)하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초세속적(超世俗的) 도(道)를 추구(追求)하는 초탈주의(超脫主義)와 자유정신(自由精神) 호방(豪放)한 기상(氣象) 등에 있어 여헌(旅軒)으로 부터 지대(至大)한 영향(影響)을 받았음을 부정(否定)할 수 없다.
주해(註解)
김우현 교수(敎授)가 간송당(澗松堂) 문집(文集)에서 발췌(拔萃)하여 원문(原文)대로 주해(註解)한 이용구절(利用句節)
1.간송당 선생 문집년보에서(澗松堂 先生 文集年譜)
선생은 일찍이 말했다. “나는 처음 기도(幾道)로 이름을 지었는데 신축(辛丑)年(1601)에 여헌(旅軒)에게 인사(人事)하였다. 선생은 말했다”
기(幾)는 가깝다는 말이다. 사람이 도(道)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또한 우연이 아니다. 다만 학자(學者)가 뜻을 세움으로서 말하면 미진(未盡)한 듯하니 마땅히 그 극한(極限)에 이를 것을 구(求)해야 한다. 입암공(立巖公)께서 그것을 듣고 옳다고 여겨 임자(任字)로 바꾸었다.
2.문집 “관규쇄설”(文集“管窺鎖說”) 中에서
“온 천하(天下)가 함께 승복(僧服)을 입고 머리를 깎으면 누가 임금이 되며 누가 신하(臣下)가 되며 누가 야인(野人)이 되어 군자(君子)를 봉양(奉養)하며 누가 야인(野人)을 다스리겠는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산림(山林)에 들어가 석가(釋迦)의 가르침을 받들면 누가 부부(夫婦)가 되고 부모(父母)와 자식(子息)이 되며 누가 형제(兄弟)가 되는가” 그러면 사람은 죽고 보존(保存)함이 없어 천지(天地)는 짐승 곤충(昆蟲) 수목(樹木)으로 가득 할 것이다.
3.면성학소(勉聖學疏)
(1)옛 사람들이 “말한 학(學)이란 것은 반드시 몸소 행(行)하고 마음으로 얻는 것을 근본(根本)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수만(數萬)가지 변화(變化)에 대응(對應)하는 것을 귀(貴)히 여겼습니다. 공부하는 것에 절도(節度)가 있었으니 전전긍긍(戰戰兢兢) 하면서 실천(實踐)에 임(臨)하여 욕심(慾心)과 분노(憤怒)를 억누르고 허물을 고쳐 선(善)으로 옮겨가고 경계(警戒)하고 삼가며 신독(愼獨)하는 것으로부터 이른바 천덕(天德)이 있으면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으니 그 요체는 신독(愼獨)에 달려있다”
단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음이 유익(有益)하다 볼 수 없고 오로지 서책상(書冊上)의 문자(文字)에 의지(依支)하는 것 또한 말단(末端)입니다.
(2)인심(人心)을 수습(收拾)하시고 어질고 능력(能力)있는지를 널리 취(取)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 급선무(急先務)입니다. 그 본원(本源)의 토대(土臺) 또한 전하(殿下)의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성학(性學)이 밝게 빛나게 하고 일취월장(日就月將)의 효과(效果)가 있어서 성심(聖心)이 공명(公明)해지고 겨울이 비고 저울이 평평(平平)한 신묘(神妙)함이 있게 된다면 萬가지 변화(變化)가 나올 것이고 百가지 법도(法度)가 오로지 곧게 되어 이미 흩어진 인심(人心)도 거의 위로(慰勞)하여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우언(寓言) 중에서
군자(君子)는 인(仁)으로 하지 난폭(亂暴)함으로서 하지 않으며 의(義)로서 하지 무력(武力)으로 하지 않으며 정직(正直)으로서 하지 속입수로 하지 않으니 진실(眞實)로 한때의 승부(勝負)와 성패(成敗)로서 그 우열(優劣)을 논(論)할 수 없는 것이다.
(4)취정록(就正錄) 중에서
간송(澗松)이 29歲 되던 계축(癸丑)年(1613)에 인동(仁洞) 있는 선산(先山:諱 淵 墓所)에 성묘(省墓)를 하고 원회당(院懷堂)에 게시는 여헌(旅軒)을 찾았다. 여헌(旅軒)은 그를 융숭(隆崇)하게 대접(待接)하면서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은 맏아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간송당(澗松堂)은 어려우서 사양(辭讓)하고 비복(婢僕)으로 하여금 대신(代身)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헌(旅軒)은 끝내 허락(許諾)하지 않으면서 거처(居處)를 자기가 있는 곳(仁洞) 이사(移徙)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권(勸)했다.간송(澗松)은 절하며 좋은 지 진실(眞實)로 소원(所願)이오나 “부친(父親)께서 이미 별세(別世)하시어 묘소(墓所)가 멀리 있는 것이 염려(念慮)되니 이것이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여헌(旅軒)은 이곳은 강[江:낙동강(洛東江)])가인데 자네의 선영(先塋)도 물가에 잇다하니 만약 작은 배 한척을 장만하여 타고 가서 가을로 성묘(省墓)한다면 왕래(往來)가 매우 편(便)할 것이다”
어찌 불가(不可)함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가까이 올 것을 재차 권(勸0했다 한다. 그러나 끝내 간송당(澗松堂0은 실행(實行)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일을 평생(平生)동안 후회(後會)로 여기게 되었다고 회고(懷古)하였다.
(5)문집년보 중에서(文集年譜)
임종당시(臨終當時)의 상황(狀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 80歲에 병세(病勢)가 깊어 약(藥)을 마시는 것을 이미 중단(中斷)했지만 오히려 경사(經史)를 외우는 것이 뚜렷하여 착오(錯誤)가 없었다.
술을 가져오라 하시어 옆의 사람들에게 한잔씩 마시라고 하시고 비록 손을 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구나! 옛 어느 사람이 임종(臨終) 할 때 기쁜 듯이 웃었다. 그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이다”라고 답(答)하시며 임종(臨終)하셨다. 군수(郡守) 권공(權公)이 부고(訃告)를 받고 방문(訪問)하였고 감사(監司) 이공(李公) 상진(尙眞)이 먼저 쌀을 부의(賻儀)로 보내고 계(啓)를 올려 조정(朝廷)에 소식(消息)을 보냈다.
(6)경종 신축(1721) (景宗 辛丑)
사림(士林) 건원소(建院疏)에 依하여 함안(咸安:安仁)) 송정서원(松亭書院)하야 간송당(澗松堂)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다. 대원군(大院君) 때 훼철(毁撤)되었다.(연세대학교 김우형 교수)
♦有文集 4卷, 續集 2卷, 追慕錄 1卷, 奉先抄儀 1卷. 見言行錄
♦墓는 咸安郡 龍華山 鵝湖子坐이고 墓碣銘은 洗馬 李光庭이 撰함
♦配는 恭人 碧珍李氏로 父는 洗馬 屹이며 忌는 7月10日이고 墓는 公墓案山巳座이다.
♦後配는 安岳李氏로 父는 訓導 春吉이며 忌는 11月2日이다. 는 墓는公墓雙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