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趙坦
페이지 정보
<요약>
-도암공(韜巖公) 조탄(趙坦) 도암공파조(韜巖公派祖)
[1552年生(明宗7壬子)-1598年(宣祖31戊戌)卒
-자(字) : 극평(克平)
-호(號) : 도암(韜巖)
-증직(贈職) :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
-조선(朝鮮) 중
<상세보기>
세계(世系) 始祖 鼎(大將軍元尹)→2代,幹(中郞將)→3代,丹碩(元尹)→4代,時雨(都領將)→5代,錫和(軍保郞)→6代,烈(正堂文學)→7代,禧(左尹)→8代,之興(參軍)→9代,天啓(版圖判書)→10代,悅(工曹典書)→11代,安(贈司僕寺正)→12代,旅(號漁溪生六臣貞節公)→13代,銅虎(珍山公贈參判)→14代,淵(耐軒公贈參議)→15代,庭彦(副司直公贈參判)→16代, 坦 公의 휘(諱)는 탄(坦)이요 자(字)는 극평(克平)이며 호(號)는 도암(韜巖)이시다. 명종(明宗) 임자(壬子明宗7)年(1552年)에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 가야읍(伽倻邑) 검암리(儉巖里) 본가(本家)에서 어계선조(漁溪先祖)의 현손(玄孫)이요 내헌공(耐軒公) 휘(諱) 연(淵)의 손자(孫子)이며 증참판공(贈參判公) 휘(諱) 정언(庭彦)의 여섯째 아드님 가운데 다섯째 아드님으로 출생(出生)하였다. 公은 여주이문(驪州李門)에 출가하시어 증(贈)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사이에 1男 3女를 두셨는데 그 1男이 덕천공(德川公) 휘(諱) 유도(由道)이시다. 덕천공(德川公)은 학문(學文)을 소중(所重)하게 숭상(崇尙)하셨는데 정구[鄭逑:鄭寒岡)선생의 문하생(門下生)이시다. 도암공(韜巖公)은 어려서부터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셨고 지혜(智慧)와 용기(勇氣)가 남달리 뛰어나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분연(憤然)히 재산(財産)을 풀어 의병(義兵)을 모병(募兵)하니 그 고을 원님 읍재(邑宰) 류숭인(柳崇仁)이 군량미(軍糧米)를 도와주었다.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 막하(幕下)에 참전(參戰)하여 정강진(鼎江陣)에서 적(賊)을 막아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웠다. 정유(丁酉)年 6月의 어느 날 낮에 꿈을 꾸었는데 선고(先考)께서 현령(顯靈)하시기를 “적(賊)이 내 택조[宅兆:묘소(墓所)]를 害친다”하셨다. 公이 놀라 달려가 묘소(墓所)에 도착(到着)하니 왜적(倭賊)들이 묘(墓)를 파 혜쳐 公은 파 낸 곽(槨)을 안고 통곡(痛哭)하니 적(賊)들이 칼로 위협(威脅)해 公이 의리(義理)로 꾸짖고 도리(道理)로 타이르니 적(賊)들이 지성(至誠)을 보고 물려났다. 公은 곽(槨)을 지고 상진(上津)을 헤엄쳐(負柩渡江) 건너 선산(善山) 월파정(月坡亭)에 이르러 장례(葬禮)를 치렀다. 公이 가정(家庭)과 국가(國家)의 원수(怨讐)에 대한 원한(怨恨)이 사무쳐 다시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왜적(倭賊)을 토벌(討伐)하니 의병장(義兵將) 길운절(吉云節)이 군량미(軍糧米)를 도와주고 순무사(巡撫使)에 보고(報告)하니 순무사(巡撫使) 이용순(李用淳)이 복수장(復讐將)으로 발탁(拔擢)하여 금오산(金烏山)의 왜적(倭賊)을 공격(攻擊)하게 하니 불을 질러 공격(攻擊)하여 패주(敗走)시켰다.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이 사실(事實)을 조정(朝廷)에 알려 특별(特別)히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록(錄)하였고 고종(高宗) 정묘(丁卯)年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셧다. 무오(戊午)年 11月에 명(明)나라 도독(都督)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포위(包圍) 당하여 고전(苦戰)한다는 소식(消息)을 접(接)하고 주둔지(駐屯地)인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출병(出兵)하여 구원(救援)하였다.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公이 울산(蔚山)으로 출병(出兵)하여 전공(戰功)을 세운데 대하여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吾君氣節出於類 留意國家日夜深 負櫬浮江知孝道 輕身赴賊識忠心” (그대의 기운(氣運)과 절개(節槪)는 무리 중에 뛰어나 나라에 대한 근심 걱정이 밤낮으로 깊었네. 아버지 관을 지고 강을 건넜으니 효도를 알겠고 몸을 날려 적진(敵陣)에 달려드니 충성(忠誠)을 알겠네)라 하였다. 또 이원익(李元翼)公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성(守城)한데 대하여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火旺山頭 火旺山城 一般義氣與崢嶸 唯陽力戰君知否 自古男兒有拾生” (화왕산 꼭대기. 화왕산성은 한결같은 의기(義氣)와 더불어 뛰어났는데 수양의 역전(力戰)을 그대는 아는가. 예부터 남자는 목숨 버리는 의리(義理)가 있었네)라 하였다.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내린 교서(敎書)에는 선무원종이등신 훈련원판관 철충조방장군 조탄(宣武原從二等臣 訓練院判官 折衝助防將軍 趙坦) 교서(敎書) 라 하였고 교서(敎書)에서 찬(撰)한 내용(內容)은 아래와 같다. “나라의 어려움이 많아 안정(安靖)되지 못한 때에 너희는 이미 중흥(中興)에 힘을 베풀어 그 공이 적지 않았는데 갚지를 못하여 나는 이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은혜(恩惠)를 미루어 구장(舊章)에 따라서 새로운 법식(法式)을 크게 드러내노라. 생각건대 남쪽의 도적(盜賊)들이 침략(侵略)하여 서토(西土)로 파월(播越)하게 되었으니 시랑(豺狼)같은 도적들이 종횡(縱橫)하매 참담(慘憺)하게 종사(宗嗣)가 몽진(蒙塵)하여 산천(山川)을 넘고 건너가는 군신(君臣)의 고생이야 어찌 차마 말로서 다 하랴. 하늘이 당나라를 흥하게 하고자 부모가 이끌어 주었고 사람들이 진나라를 추대함에 모든 사람이 몸을 바쳤도다. 다행히 난(亂)이 평정(平靜)되어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 공을 가리어 정명(鼎銘)으로 기록(記錄)하노라. 생각건대 너희 경대부(卿大夫) 및 사서인(士庶人)들이 혹은 나의 무렬(武烈0은 날리고 혹은 나의 군수(軍需)를 도와서 창을 잡고 말을 달리며 혹은 목숨을 바치는 선비가 있고 무기(武器)를 끌고 싸움에 나가 적의 목을 바치는 사람도 이었으니 이제 모두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後世)에 전(傳)할 것이다. 가벼운 공이나 무거운 공이나 모두 한결같은 공로(功勞)이니 너희의 자손들이 만세(萬世)토록 안락(安樂)을 누리리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생각하면 마땅히 알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효(孝)와 충(忠)이 출천(出天)하신 어른이셨다. 公이 장가들어 신기(新基)를 잡은 곳은 그의 자손(子孫)이 대대(代代)로 살아오고 있는 함안(咸安) 산인면(山仁面) 수동(洙洞)이다. 이곳 수동은 도암공이 초석(礎石)을 놓은 지 어언 4百年이 되었다. 公의 종택(宗宅)은 한 곳에서 4百年을 면면(綿綿)히 지켜오면서 문학(文學)이 부절(不絶)하였고 재력(財力) 또한 유여(有餘)하여 내객(來客)이 운집(雲集)하였으며 특히 公의 외아들이신 덕천공(德川公:由道)을 비롯한 7대손(代孫) 신묵재(愼黙齋)公 10대손(代孫) 심재공(心齋公:諱 性濂) 자암공(紫岩公:諱 性源) 형제(兄弟)분과 12대손(代孫) 회서(晦西:諱 鏞雷)公이 세인(世人)들의 추앙(推仰)을 받아온 재사(才士)이시다. 公의 宗宅은 어느 宗宅에 비(比)해 손색(遜色)이 없는 가세(家勢)를 갖추어 他 가문(家門)의 일컬음을 받아왔으나 불행(不幸)하게도 6.25전란(戰亂)을 當하여 소실(燒失)되었다. 조상(祖上)의 신위(神位)가 모셔진 가묘(家廟)마져 불길에 쌓였으니 多幸히 사당(祠堂)이 온전하게 保存되어 있었다. 끝으로 중형(仲兄) 되시는 청송(靑松) 망운정(望雲亭)公에게 보낸 시(詩) 한 수(首)를 적어본다. “奉別 仲兄 望雲亭 址歸安德 草草窮道會 忽忽又別離 風霜湥萬塾 涕淚灑千岐 最恨山川隔 更何消息遲 臨分休惜醉 新月入情危” 公은 임자(壬子)年(1612年) 11月 20日 61歲에 졸(卒)하셨다. 묘소(墓所)는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용화산(咸安郡 代山面 九惠里 龍華山) 건좌(乾坐)이고 누세(累世)의 선조(先祖)님이 모셔져 있고 山 아래에는 용호재(龍湖齋)가 있이며 덕천정(德川亭)은 수동(洙洞)에 있다.公응 咸安趙氏 도암공파 파조(韜巖公派派祖)이시며 십삼충(十三忠)의 한 분이다.(宗孫 宗來) 配는 贈貞夫人 驪州李氏이고 父는 部將 極이며 忌는 2月22日이고 墓는 公墓雙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