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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亨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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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계공(東溪公) 조형도(趙亨道) 동계공파조(東溪公派祖)
[1567年(明宗22丁卯)生-1637年(仁祖15丁丑)卒]
-자(字) : 대이(大而)
-호(號) : 동계(東溪)
-증직(贈職) : 가선대부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부원수
(嘉善大夫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副元帥)
-조
<상세보기>
세계(世系)
始祖 鼎(大將軍元尹)→2代,幹(中郞將)→3代,丹碩(元尹)→4代,時雨(都領將)→5代,錫和(軍保郞)→6代,烈(正堂文學)→7代,禧(左尹)→8代,之興(參軍)→9代,天啓(版圖判書)→10代,悅(工曹典書)→11代,安(贈司僕寺正)→12代,旅(號漁溪生六臣貞節公)→13代,銅虎(珍山公贈參判)→14代,淵(耐軒公贈參議)→15代,庭彦(副司直公贈參判)→16代,堣( 17代 亨道
1.출생(出生)과 성장(成長)
공(公)의 휘(諱)는 형도(亨道) 자(字)는 대이(大而)이며 호(號)는 동계(東溪)요 명종(明宗) 정유(丁酉:1567年)에 망운공[望雲亭:휘(諱) 지(址)]의 둘째 아드님으로 出生하였다. 10歲에 백부(伯父) 일암[釰岩)公휘(諱) 우(堣)]의 후사(後嗣)로 입양(入養)하였으니 어계선조(漁溪先祖)의 5세손(世孫)이며 내헌공(耐軒公) 휘(諱) 연(淵)의 증손(曾孫)으로 함안(咸安) 검암(儉岩)과 청송(靑松)의 생양양정(生養兩庭)에 지효(至孝)하였다.
1587年 21歲에 함안(咸安)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이때 계기(契機)가 되어 함안군수(咸安郡守) 한강(寒岡) 정구(鄭逑)先生 문하(門下)에서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였다.
(2) 임진정유양란(壬辰丁酉兩亂)
1592年 선조(宣祖)25年 임진(壬辰)年 公이 26歲 때 왜란(倭亂)이 일어나 公은 동생 송포공[松浦公:휘(諱) 종악(宗岳)]을 의병장(義兵將) 권응수(權應銖) 막하(幕下)로 먼저 보내고 몸소 동생 지악공[芝嶽公:휘(諱) 동도(東道)]과 더불어 청송(靑松)의 병장이 되어 팔공산(八空山) 회맹(會盟)에 참가(參加)하시고 빙부(聘父)인 죽편 오운(吳澐)公과 합세(合勢)하여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 곽망우당(郭忘憂堂) 진영(陣營)으로 가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왜병(倭兵)의 발아래 무참(無慘)히 초토(焦土)가 된 강산(江山)을 목도(目睹)한 청년(靑年) 유생(幼生) 公은 붓을 거두고 검(劍)을 들기로 결심(決心)하여 갑오(甲午)年 전시무과(戰時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이듬해 하양현감(河陽縣監)과 청하현감(淸河縣監)에 이어 그해 10月 경산현령(慶山縣令)을 제수(除授)받아 큰 치적(治積)을 남기고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열읍수령(列邑首領)과 함께 팔공산(八空山)에 들어가 왜적(倭敵)과 싸운 기록(記錄)이 있다.
이어 고성현령(固城縣令) 보성군수(寶城郡守)를 거쳐 광해(光海) 14年 公은 경상도(慶尙道) 토포사(討捕使)로 영주옥(榮州獄)을 탈옥(脫獄)한 잔당(殘黨)을 소탕(掃蕩)하는데 功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에 올랐다.
(3) 정묘호란(丁卯胡亂)
인조(仁祖) 5年 公의 회갑(回甲)年에 후금[後金:뒤의 청(淸)]의 침입(侵入)이 있어 진주영장(晋州營將)과 상주영장(尙州營將)에 불부(不赴)한 뒤 괴산군수(槐山郡守)를 제수(除授)받자 군수(郡守) 사임소(辭任疏)를 올리며 소두(疏頭)에 “文臣不愛錢 武臣不惜死 方可以蕩平虜”라 하였으니 卽 “문신(文臣)은 재물(財物)을 탐(耽)하지 말며 무신(武臣)은 죽음을 아끼지 말아야 침범(侵犯)하는 오랑캐를 평정(平靜)할 수 있다”고 하고 상소문(上疏文) 가운데 “신(臣)이 새로 제수(除授)받은 고을은 조령(鳥嶺)이 곁에 있는 벽지(僻地)입니다. 신(臣)이 비록 늙었으나 스스로 힘을 수습하여 국사(國事)를 도모(圖謀)해야 하거늘 어찌 감(敢)히 산골의 고을에 안일(安逸)하게 있으면서 이러한 위급(危急)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기록(記錄)하였으니 구구절절(句句節節) 공의 충성심(忠誠心)을 였볼 수 있었다.
인조(仁祖)9年 公이 65歲에 경주영장(慶州營將)의 3年間 재임(在任)을 끝으로 관직(官職)에서 물러나자 고을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公의 덕(德)을 칭송(稱頌)하였다.
(4) 병자호란과 순국(丙子胡亂과 殉國)
1636年 인조(仁祖)14年 병자(丙子)年 公이 70歲가 되던 해 4月에 후금(後金)이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변경(變更)하고 그해 12月 2日 청(淸) 태종(太宗)이 10萬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14日 개성(開城)을 통과(通過)하자 이때 강화도(江華島)길이 막힌 인조(仁祖)와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避難)하면서 조정(朝廷)은 팔도(八道)에 근왕병(勤王兵) 모집(募集)의 칙사(勅使)를 급파(急派)하였다. 16日 淸나라 선봉(先鋒)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包圍), 다음해 1月 1日 청(淸) 태종(太宗) 본진(本陣)까지 집결(集結)하였으니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은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었다. 公이 모병(募兵) 급보(急報)를 接하여 출진(出陣)코자 하니 나이 70 고령(高齡)에 特히 그해는 혹한(酷寒)이라 주위(周圍)에서 모두 만류(挽留)하였으나 “내가 누대(累代) 임금의 두터운 은혜(恩惠)를 받았는데 무장(武將)으로 마땅히 나라를 爲하여 죽어야 한다” 하며 중원목계(中原木溪)의 관찰사(觀察使) 심연(沈演)의 진영(陣營)으로 달려갔다. 관군진영(官軍陣營)에서는 진격(進擊)의 기미(氣味)가 보이지 않자 公은 선봉장(先鋒將)을 자청(自請)하면서 결사항쟁(決死抗爭)을 주장(主張)하였지만 심공(沈公)이 公의 노령(老齡)을 염려(念慮)하며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연이어 들려오는 강화성(江華城) 함락(陷落) 소식(消息)과 강화논의(講和論議) 等에 우국통분(憂國痛憤)을 참기 어려워 하다가 드디어 굴욕적(屈辱的) 비보(悲報)를 듣고 충분(忠憤)을 참지 못하여 등창(背瘡)이 터져 진중(陣中)에서 急히 귀향(歸鄕) 수일(數日)만인 정축(丁丑) 3月 4日 서거(逝去)하셨다. 향수(享壽) 71歲로 임종시(臨終時) “張目喉中語(눈을 부릅뜨고 목으로 외침)하시며 돌아가셨다한다. 그 해 8月 하양현 대한동 팔공산(河陽縣大閑洞八空山) 총정 후록(叢亭 後麓) 해좌(亥坐)에 안장(安葬)되니 신후지(身後地)로 자복(自卜)하신 곳으로 지금도 드문 명지(明地)로 손 곱힌다. 公은 뒷날 청송(靑松) 덕봉사(德奉祠)에 배향(配享)되시고 어명(御命)으로 편찬(編纂)된 존주휘편(尊周彙編)과 충렬록(忠烈錄)에는 公의 휘적(輝蹟)이 증재되엇고 동계집(東溪集) 3卷이 전(傳)해지고 있다. 咸安趙氏동계공파파조(東溪公派派祖)이시며 십삼충(十三忠)의 한분이시다.(趙大浩)
有文集 4卷이 있고 配는 贈貞夫人 高敞吳氏로 父는 參議 澐이고 墓는 仁洞 天生山下 艮坐이다.